73. 종각대사(宗覺大師)에게 드리는 글
부처님의 말씀은 마음으로 종지를 삼으니 종지에 통하면 말에도 통합니다. 이미 종문(宗門)이라고 말했다면 지리멸렬하게 근본을 버리고 지말을 쫓으면서, 말과 경계를 따라서 틀에 박힌 형식을 지어서야 되겠습니까.
요컨대 곧장 초월 증득하여, 현묘하고 수승 청정한 심성의 경계를 꿰뚫어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면밀하고 온당한 향상의 큰 해탈에서 큰 쉼의 마당에 그대로 사무쳐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은 텅 빈 것처럼 한가롭지만 원만하게 증득한 작용은 한계지울 수 없을 정도여서, 천 사람 만 사람이라도 그를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석가노인께서는 오랫동안 이 요점에 대해 말이 없으셨고, 삼백여회의 설법에서도 조금도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근기를 따라 구제하면서 시절이 도래하기를 기다렸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영산회상에서 얼굴을 드러내자 유독 금색두타만이 그의 낚시에 걸렸는데, 이를 교외별전이라 합니다. 이 종지를 알았다고 한다면 위음왕불 이전에 벌써 헛점을 보인 셈입니다. 점검해보자면 종류를 따라 몸을 변화해내는 모든 기량과 기연이 이 하나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단순히 보고 천박하게 들어 알음알이를 간직하고 기관작용에 떨어진 자가 헤아릴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방을 하고, 할을 하며, 나무공을 굴리고, 집게를 높이 들며, '차 마시게'하고, '북칠 줄 아는군'하며, 가래삽을 꽂고 소를 치고 경계와 지혜를 나타내며, 자리에 앉아 문을 닫아걸고, 되돌려 불러서 혀를 차며 꾸짖고 따귀를 치며 짓밟기도 하는 이런 것들이 다 '이것' 아님이 없었습니다.
본색납자만이 자기가 투철히 깨닫고, 다시 대종사의 악독한 솜씨를 만나 걸러내고 단련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을 무는 사자의 경지에 도달하여 이것저것 가림[藥忌]을 따르지 않고 툭 트인 곳에 단도직입하여서야, 한번 거량하면 바로 귀결점을 알게 됩니다. 이는 마치 사자가 굴에 들고나며 땅에서 몸을 되날리는 것과도 같은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헤아리겠습니까.
이 종문에서는 진흙탕 속에 끌고다니고 물에 띄우며 잡초 속에 구르거나, 언어문자를 짓거나, 눈이 어두워 세 번 찌르며 불러도 되돌아보지 않는 자는 논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팔면으로 적을 맞으면서 들기 전에 이미 알고 말하지 않아도 먼저 계합하여, 물에 우유 섞이듯 자연히 서로 합치하여 자리에 앉아서 옷을 입으며, 순수하게 길러서 서리와 이슬을 맞고 과일이 익기를 기다렸다가 나오기만 하면 바로 이처럼 작용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선대조사가 근본 발심수행할 때, 한바탕의 불사를 행했던 데에 합당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러한 일을 궁구하려 한다면 반드시 이러한 사람이라야만 한 것이요, 이러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일을 근심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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