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종용록從容錄

만송노인 평창 천동각화상송고 종용암록 서

쪽빛마루 2016. 3. 21. 05:26

만송노인 평창 천동각화상송고 종용암록 서

 

 지난날 내가 서울[京師]에 있을 때, 그곳에는 많은 선사들이 있었지만 그중에 특히 성안사(聖安寺) 징공(澄公)화상은 정신과 기개가 명백하고 단엄하며 말씀이 분명하고 공명정대하였으므로 내 유독히 그를 중히 여겼다. 그래서 한번은 조사의 도를 가지고 찾아가 이것저것 옛 큰스님들의 어록 중 배울 만한 점들을 가지고 묻곤 하였는데 간혹 징공(澄公)이 옳다고 인정하는 부분이 있으면 나 역시 마음속에 스스로 얻는 바가 있었다.

 그러다가 근심거리를 만난 뒤로부터는, 공명심은 높은 누각에다 묶어두고 조사의 도를 구하는 일에만 더욱 서둘렀다. 전에 논의하던 문제를 가지고 성안사를 두번째 찾아가니 스님께선 전에 보였던 것과는 달리 태도가 바뀌어 있었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자 스님은 조용히 내게 말해 주었다.

 "지난날 그대는 요직에 몸담고 있었다. 그리고 유학(儒學)하는 사람은 대부분 불서를 깊이 믿지 않고 어록을 뒤적이면서 말 밑천이나 삼으려 하기 때문에 내 감히 수고스럽게 선가의 매서운 수단을 써주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그대의 마음을 헤아려보니, 과연 본분사(本分事)를 가지고 내게 물어오는데 내 어찌 전의 허물을 답습하여 입 아프게 이야기해주지 않으랴. 그러나 나는 늙었고, 평소 유학에는 통달치 못하였으니 그대를 가르칠 수가 없다. 만송노인(萬松老人)이란 분이 있는데 그는 유가와 불도를 겸비하고 종지와 설법에 모두 정통하시며 걸림없는 말솜씨를 가지셨다. 그대는 그분을 뵙는 것이 좋겠다."

 내가 만송노인을 뵈었을 때 그는 인적을 끊고 집안 일을 물리치고 혹한이나 무더위에도 참선을 거르는 날이 없었고 아침해가 뜰 때까지 기름 등을 태워 공부하며 침식을 잊고 지낸 지 거의 3년이었다. 나는 외람되게도 스님의 법은(法恩)을 입고 자식으로 인가받아 담연거사 종원(湛然居士從源)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스님과 참학을 할 때면 그 기봉을 헤아리기 어려웠고 변화가 무궁하였다. 만 길 봉우리같이 우뚝하여 어떻게 우러러볼 길이 없고 만경창파같이 도도하여 도저히 끝을 재볼 수 없었다. 우러러보면 앞에 있는 듯하다가 홀연히 뒤에 가 있곤 하여, 평소에 배웠던 것을 되돌아보니 모두가 흙덩어리였다. 아! 동산(東山)에 올라 노(魯)나라를 좁다 하시고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를 좁다 했던 것이 어찌 빈말이었겠는가? 이 깊은 곳에 아직 들어오지 못한 자는 이 말을 들으면 필시 내가 근본을 잊고 이단이나 좋아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오직 한가한 병풍산만이 서로가 서로를 비추지 않겠는가?

 그뒤 명을 받들어 행재소(行在所)에 나가 호종관(扈從官)으로서 서쪽으로 정벌을 나가게 되었으므로 스님과 몇 천 리나 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스님이 평소에 하신 법어와 게송은 전부 사형 융공(隆公)이 간수해 왔는데 지금은 그 원본을 다시 얻어볼 수 없다.

 우리 종문에 천동(天童)이란 분이 있어 송고(頌古) 백 편을 지었는데 그것을 절창(絶唱)이라고들 한다. 나는 만송노인(萬松老人)께 '이 송에 평창(評唱)을 붙여 후학들을 틔워 일깨워주십사'하고 간청하는 편지를 7년을 두고 전후로 아홉 차례나 보냈는데 이제서야 답장을 받게 되었다.

 나는 서역에서 외롭게 몇 해를 지내다가 홀연히 이 편지를 받고 보니 술에서 깨어난 듯, 죽었다 다시 소생한 듯 뛸 듯이 환호하였다. 동쪽을 바라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재삼재사 펼쳐놓고 음미하면서 책을 매만지며 감탄하였다.

 "만송스님이 서역에 오신 듯하다. 그 한 조각 말, 반쪽 글자들이 모두 귀결처를 가리키고 안목을 내놓은 것이로다. 고금에서 가장 뛰어날 정도로 높아서 만세의 모범이 될 만하다. 인간과 하늘을 저울질하고 조화해내는 자가 아니라면 뉘라서 여기에 동참할 수 있으랴."

 나는 동료 관원 몇 명과 아침저녁으로 이 책에 푹 젖어 지냈는데 큰 보배산에 오르는 듯 화장세계 바다에 들어간 듯하였다. 굉장하고 진귀한 보물들이 광대하게 갖추어져 있어 이쪽을 가도 저쪽을 가도 맞닥뜨려 눈이 풍부해지고 마음도 배불렀으니 어찌 세간의 언어로 그 만분의 일이나마 형용할 수 있겠는가? 내 감히 그 훌륭한 것을 독차지할 수 없어 천하와 공유하기로 생각하였다.

 그런 차에 서로의 나이와 관계없이 교분을 맺어오던 경성(京城)의 사제 종상(從祥)이라는 자가 이 책을 세상에 펴내서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자고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래서 이에 서(序)를 쓴다.

 

부처님과 조사, 여러 스승이 뿌리를 천 길 땅 속에 묻으니

백칙의 기연들이 세상에 나와서 싹을 틔웠네.

천동은 가지를 빼려 하지 않는데 만송인들 어찌 덩굴을 늘어뜨리랴.

나 담연은 가지와 덩굴 위에 억새풀새끼를 더해서

그것으로 향기를 찾아가고 쫓아가는 코를 꿰고

현묘함을 체득하고 행하는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리라.

다리는 따을 딛고 코는 하늘을 뚫으려 하는가.

그렇다면 도리어 덩굴더미[葛藤] 속에서 꿰어야 옳다 하리라.

 

 갑신년 중원일(中元日) 칠수이자초재(漆水移刺楚才) 진경(晋卿)이 서역 아리마성(阿里馬城)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