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종용록從容錄

종용록 中 제48칙 유마경의 불이[摩經不二]

쪽빛마루 2016. 4. 21. 05:59

제48칙

유마경의 불이[摩經不二]

 

 

 대중에게 보이시다.

 묘한 작용이 끝이 없으나 손 쓸 수 없는 곳이 있고, 말재주가 걸림이 없으나 입을 열지 못할 때가 있다. 용아(龍牙)는 손이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먹을 행사할 줄 알게 했고, 협산(夾山)은 혀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을 할 줄 알게 하였거니와 도중[中途]에 몸을 돌려 빠지는 이는 그 어떤 사람이던고?

 

본칙

 드노라.

 유마힐(維摩詰)이 문수사리에게 묻되 "어떤 것이 보살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것입니까?" 하니,

 -물은 곳이 몇째 것인고?

 

 문수사리가 대답하되

 -주먹으로 입을 쥐어질러 틀어막았어야 좋았을텐데…….

 

 "내가 생각하기로는

 -단술을 빚어올 때마다

 

 모든 법에 대하여

 -그래도 모자란다.

 

 말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횃불을 들고 살펴보면

 

 남에게 보일 수도 없고 자기가 알 수도 없어서

 -있어 왔다.

 

 모든 문답을 여읜 것이

 -낯가죽이 얼마나 두껍지?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 여깁니다" 하였다.

 -어떤 것이 둘이지?

 

 그리고는 문수사리가 도리어 묻되 "우리들은 제각기 말씀을 다 했거니와

 -능숙한 말이요, 시원한 말이지.

 

 그대여, 말씀하소서. 어떤 것이 보살이 불이법문에 드는 것입니까?" 하니,

 -하나는 바꿔치기 하고 하나는 깎으니, 나쁜 발상하는 노름꾼과는 도박을 않는다.

 

 유마가 잠자코 있었다.

 -어디로 갔을까?

 

평창

 스승께서 이르시다.

 범어의 유마힐은 번역하면 무구칭(無垢稱) 또는 정명(凈名)이라 한다. 아내의 이름은 금희(金姬)요, 아들의 이름은 선사(善思), 딸의 이름은 월상(月上)이다.

 어떤 승이 운거 간(雲居簡)에게 묻되 "유마는 금속여래(金粟如來)의 후신인데 어찌하여 석가의 화상에 참여하여 법문을 들었습니까?" 하니, 운거가 이르되 "그는 타인과 나[人我]를 다투지 않기 때문이니라" 하였다.

 광본(廣本) 「유마경(維摩經)」에는 삼만 이천 보살이 제각기 불이법문을 설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오직 삼십이 보살이라 하였다. 마지막에 문수는 송곳 세울 자리도 없었으나 유마는 송곳조차 없는 소식을 보였다. 보복 종전(保福從展)이 이르되 "문수는 귀를 막고 요령을 훔치다가 오강(烏江)에서 힘이 다했고, 유마는 한 번 침묵에 드니 교화의 문턱을 나서지도 않았다" 하였는데, 만송은 이르노니 "사람은 시비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하노라. 보복이 또 이르되 "알량한 유마가 문수에게 한 번 쓰러지더니 지금껏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였는데, 만송은 이르노니 "일어나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따귀를 한 대 갈기리라" 하노라.

 낭야 혜각(瑯琊慧覺)이 이르되 "문수가 그토록 선하다고 찬양했으나 겨우 표주박 점[杓卜]을 치면서 허공의 소리를 들으려는 격이었다. 그래서 유마는 잠자코 있었으니, 그대들은 이리저리 추측[鑽龜打瓦]해서는 안 된다" 하였는데, 만송은 이르노니 "엉터리[杜撰]가 적지 않구나!" 하노라.

 오직 설두만이 문수가 물음을 마친 자리에서 말없이 잠자코 양구한 뒤에, 자리에 버티고 앉아서 이르되 "유마가 무엇이라 말했던가?" 하였고, 다시 이르되 "감정해 마쳤다" 하였지만, 만송은 이르노니 "귀신노릇 할 줄을 몰라서 한낮에 나타났구나!" 하노라.

 천의 의회(天依義懷)가 송하되"유마는 침묵도 양구도 않고 / 그저 자리에 앉아 따지니 허물이 이루어졌다 / 요즈음 제방에서 문답하는 것을 보니 / 아직도 이것을 양구라 하네" 하였는데, 어떤 승이 그 스승에게 묻되 "선사들의 어록에는 양구라는 말이 많은데 그 양구라는 게 누구입니까?" 하니, 스승이 대답하되 "이는 양씨(梁氏)에 여덟째 동생이다" 하니 전하는 이들이 웃음거리로 삼았다.

 천의의 나중 두 구절은 소름이 오싹하고 초연하고 준엄하게 이른 것으로서, 취모검이 갑 속에서 싸늘한 기운을 뿜어 / 외도와 천마들의 목을 모두 벤다는 기상이나, 만송은 이르노니 "신비한 칼날이 가만히 목을 지나갔건만 아픔도 간지러움도 느끼지 못하는구나!" 하노라.

 백운 수단(白雲守端)이 송하되 "한 개, 두 개, 백천 개여 / 손가락 꼽으면서 글줄을 세기에 끝날 줄이 없도다 / 잠시 어두컴컴한 창 밑에 밀쳐두었다가 / 내일 다시 그대와 계산해보세!" 하였는데, 만송은 이르노니 "무슨 부질없는 헛수고냐?" 하노라.

 천동이 마조(馬祖)의 장두백 해두흑(藏頭白海頭黑 : 제6칙 참조) 화두를 송하고 그 마지막에 이르되 "당당히 혀끝을 눌러 앉히니 비야성의 늙은 선생[老古錐]을 비웃음직하여라." 하였는데 오늘 유마를 만났으니, 눈치[面譽]에 관계치 않으리라.

 

송고

 만수(曼殊)가 비야리성 노거사의 문병을 갔는데

 -도의상으론 당연하지.

 

 불이문(不二門)을 활짝 열고 작가(作家)를 찾아봤네.

 -납승의 분상에서 할 일이지.

 

 옥돌 속의 순수한 옥을 뉘라서 감정해내랴?

 -큰 변재는 도리어 말더듬이 같고.

 

 앞도 잊고 뒤도 잊었으니, 애타게 한탄치 말자.

 -큰 지혜는 도리어 바보 같으니라.

 

 구구하게 옥돌을 바침이여, 초왕의 궁정에서 벌 받은 사나이[臏士]요

 -곧은 것 바치고 굽은 것 받았다.

 

 찬연하게 구슬로 보답함이여, 수나라 성의 끊겼던 뱀이라.

 -야광을 사람에게 던지면 칼을 뽑지 않을 자 누구냐?

 

 점검하려 들지 말라.

 -다행히 본래부터 완전했거니…….

 

 티가 없나니

 -마음대로 점검해보라

 

 속기(俗氣)가 전혀 없는데도 약간 미흡하구나!

 -겉모양으로 사람을 취하면 잃는 수가 많다.

 

평창

 스승께서 이르시다.

 문수사리(文殊師利)와 만수실리(曼殊室利)는 같은 범어를 다르게 음역한 것[梵音楚夏]이니, 번역하면 묘길상(妙吉祥)이다. 비야리는 번역하면 광엄(廣嚴)이니, 성(城)의 이름이다.

 조공(肇公)의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에 이르되 "석가는 마갈(摩竭)에서 문을 닫았고, 정명(淨名)은 비야에서 입을 다물었다. 수보리는 말없는 말을 외쳐서 도를 드러냈고, 제석과 범왕은 들음없이 듣고 꽃비를 내렸으니, 이 모두가 이치는 정신으로 몰아야 한다는 뜻이므로 입으로는 침묵을 했으나 그 어찌 말이 없으리요?" 했으니, 말로는 능히 말할 수 없는 바이기 때문이다. 연(燕)의 옥돌[珉]은 옥(玉)에 버금가는 것으로, 지금 탁군(涿郡)의 고수석(靠水石)이며 탈옥석(奪玉石)이라고도 불리운다. 유마가 겉으로는 어눌한 것 같으나 그 말하지 않는 변재가 그 속에 정수를 이루고 있으니, 마치 돌이 옥을 가리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앞도 잊고 뒤도 잊었다 함은 「영가집(永嘉集)」의 사마타송(奢摩他頌) 제4에 이르되 "여기서 말한 안다는 것은 알음으로써 알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알 뿐이다. 그렇게 되면 앞쪽으로는 사라짐과 이어지지 않고, 뒤쪽으로는 일어남을 이끌지 않아서 앞뒤의 연속이 끊어지고 중간이 스스로 외로이 존재한다" 하였다.

 무진등(無盡燈 : 문수좌)의 뒤의 법통은 자세치 않다. 중간에 개봉부(開封府) 이문산(夷門山) 광지(廣智) 선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휘는 본숭(本嵩)이었으나 별다른 어록은 없고 오직 이 대목만을 들었다. 그런데 문수좌는 이 구절이 「영가집」에서 나온 것인 줄 모르고, 본숭이 처음 창출한 것이라 했으므로 여기에서 잠시 밝힌 바이니, 학자들은 그런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앞도 잊고 뒤도 잊는다는 법문은 정확히 말하면 3조의 「신심명(信心銘)」에서 이르기를 "언어의 길이 끊겨 과거 · 미래 · 현재가 아니다" 한 데서 나온 것이다.

 「한비자(韓非子)」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의 곤강곡(崑岡谷)에서 박옥(璞玉 : 옥돌)을 얻어 초(楚)의 여왕(廬王)에게 헌납했더니 왕은 '돌이라' 하고는 한쪽 발을 월(刖 : 발꿈치를 자르는 형벌)했다. 무왕(武王)이 즉위한 뒤에 또 헌납했다가 한쪽 발을 마저 월을 당했다. 문왕(文王)이 선 뒤에 변화가 박옥을 안고 형산 밑에 가서 곡을 하니, 문왕이 듣고 그 사연을 물었다. 이때 변화가 대답하되 '두 발을 끊긴 것을 원망함이 아니라 참옥을 잡석이라 하는 것이 원통하고, 충성하는 일을 속이는 일이라 여기는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하였다. 문왕이 좌우를 시켜 돌을 쪼개도록 하고 보니 참옥이었다. 이에 문왕이 탄식하면서 이르되 '딱하고져, 두 선군께서는 사람의 발꿈치는 쉽게 쪼개면서 돌 하나 쪼개기는 어려이 여겼도다. 이제 이 벽옥(璧玉)은 과연 국보로다' 하였다"고 한다.

 「사기(史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수(隨)의 제후 축원창(祝元暢)이 제(齊)나라 가던 길에 뱀 한 마리가 허리가 끊겨 죽어가는 것을 보고 물에 씻은 뒤, 신비한 약을 발라주고 갔다. 그뒤 어느날 밤에 뜰에 이상한 광채가 나타남을 보고는 도적이라 생각하고, 칼을 뽑아들고 가까이 가서 보니, 뱀 한 마리가 구슬을 물어다가 땅에다 놓고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뱀이 은혜를 갚으려고 왔음을 알았다"고 한다.

 유마는 온몸으로 대중을 위했으나 사사로운 문중에서 재화가 남을 면치 못했거니, 문수의 점검으로 티가 드러났음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설사 천동이 이르기를 "시현으로 세속에 살지만 세속의 티가 없다" 하였거니와 역시 코를 막고 향을 훔치는 격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