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법(法)은 무생(無生)
10월 8일 대사께서 배휴에게 말씀하셨다.
"화성(化城)이란 이승(二乘) 및 10지 · 등각 · 묘각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중생을 이끌어 주기 위한 방편으로 세운 가르침이므로, 글자 그대로 모두 변화하여 보인 성곽이다. 또한 보배가 있는 곳이란 다름 아닌 참된 마음으로서의 본래 부처이며, 자기 성품의 보배를 말한다. 이 보배는 사량분별에 속하지도 않으니, 그 자리에는 아무 것도 세울 수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주관도 객관도 없는데 어느 곳에 성(城)이 있겠느냐? 만약 '이곳을 이미 화성이라 한다면 어느 곳이 보배 있는 곳인가?' 하고 묻는다면, 보배 있는 곳이란 가리킬 수 없는 것인데, 가리킨다면 곧 방위와 처소가 있게 되므로, 참으로 보배가 있는 곳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경에서도 말씀하시기를 '가까이 있다' 고만 했을 뿐이다. 그것을 얼마라고 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니, 오로지 그 자체에 계합하여 알면 되는 것이다.
천제(闡提)란 믿음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6도의 모든 중생들과 이승(二乘)들은 부처님의 과[佛果]가 있음을 믿지 않으니, 그들을 모두 선근(善根)이 끊긴 천제라 한다. 보살이란 불법이 있음을 굳게 믿고 대승 · 소승을 차별하지 않으며, 부처와 중생을 같은 법성(法性)으로 본다. 이들을 가리켜 선근이 있는 천제라 한다. 대개 부처님의 설법[聲敎]을 듣고 깨닫는 사람을 성문(聲聞)이라 하고, 인연을 관찰하여 깨닫는 사람을 연각(緣覺)이라 한다. 그러나 자기 마음속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비록 부처가 된다 하더라도 역시 성문불이라 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교법(敎法)에 있어서는 깨닫는 것이 많으나, 마음 법[心法]에 있어서는 깨닫지 못하는데, 이렇게 하면 비록 겁을 지나도록 수행을한다 해도 마침내 본래의 부처는 아니다. 만약 마음에서 깨닫지 못하고서 교법에서 깨닫는다면, 마음은 가벼이 여기고 가르침만 중히 여겨 흙덩이나 쫓는 개*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본 마음을 잊었기 때문이다. 본래 마음에 계합하면 될 뿐, 법을 구할 필요가 없으니, 마음이 곧 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계가 마음을 가로막고 현상[事]이 본체[理]를 흐리게 하여, 의례껏 경계로부터 도망쳐 마음을 편히 하려 하고, 현상을 물리쳐서 본체를 보존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마음이 경계를 가로막고, 본체가 현상을 흐리게 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마음을 비우기만 하면 경계는 저절로 비고, 본체를 고요하게만 하면 현상은 저절로 고요해지므로 거꾸로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보통 마음을 비우려 들지 않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해서인데, 자기 마음이 본래부터 비었음을 모르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경우는 경계는 없애려고 하면서 마음은 없애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마음을 없애지 경계를 없애지 않고, 나아가 보살은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기가 지은 복덕마저도 탐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버림에는 세 등급이 있다. 즉 안팎의 몸과 마음을 다 버림이 허공과 같으며, 어디에고 집착하지 않은 다음에 곳에 따라 중생
에게 응하되, 제도하는 주체도 제도될 대상도 모두 잊는 것이 '크게 버림[大捨]'이다. 만약 한편으로 도를 행하고 덕을 펴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이바지하여 놓아 버리고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으면 '중간의 버림[中捨]'이다. 또한 착한 일을 널리 행하면서도 바라는 바가 있다가 법을 듣고서는 빈[空] 줄을 알고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은 '작은 버림[小捨]'이다.
큰 버림은 마치 촛불이 바로 정면에 있는 것과 같아서 더 미혹될 것도 깨달을 것도 없으며, 중간 버림은 촛불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며, 작은 버림은 마치 촛불이 등 뒤에 있는 것 같아서 눈앞의 구덩이나 함정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살의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일체를 다 버린다.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과거를 버린 것이고, 현재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현재를 버린 것이며, 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미래를 버린 것이니, 이른바 3세를 함께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께서 가섭에게 법을 부촉하실 때로부터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였으니, 마음과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 허공에다 도장을 찍으면 아무 문체가 찍히지 않고, 그렇다고 물건에다 도장을 찍으면 법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써 마음에 새기는 것이니,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 새김[能]과 새겨짐[所]이 함께 계합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어서, 그것을 얻은 사람은 매우 적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없음[無心]을 말하는 것이고, 얻음도 얻었다 할 것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는 세 몸[三身]이 있는데, 법신은 자성의 허통(虛通)한 법을, 보신(報身)은 일체 청정한 법을, 화신(化身)은 6도만행법을 말한다. 번신의 설법은 언어 · 음성 · 형상 · 문자로써 구할 수 없으며, 설할 바도 없고 증득할 바도 없이 자성이 허통(虛通) 할 뿐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한 법도 설할 만한 법이 없음을 설법이라 이름한다'고 하셨다. 보신이나 화신은 근기에 따라 감응하여 나타나고, 설하는 법 또한 현상에 따르고 근기에 알맞게 섭수하여 교화하는 것이므로, 이 모두는 참다운 법이 아니다. 그래서 '보신 · 화신은 참된 부처가 아니며, 법을 설하는 자가 아니다'고 하신 것이다.
이른바 밝고 정밀한 성품인 일정명(一精明)이 나뉘어 6화합(六和合)이 된다고 하였다. 일정명이란 바로 한 마음[一心]이요, 6화합이란 6근(根)이다. 이 6근은 각기 6진(六塵)과 합하는데, 눈은 색과, 귀는 소리와, 코는 냄새와, 혀는 맛과, 몸은 촉감과, 뜻은 법과 제각기 합한다. 그런 가운데 6식(識)을 내어 18계(十八界)가 된다. 만약 이 18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면, 6화합이 하나로 묶이어 일정명이 된다. 일정명이란 곧 마음이다. 그런데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모두 알면서도, 일정명과 6화합에 대해 알음알이만을 지어서 드디어는 교설에 묶이어 본래 마음에 계합치 못한다.
여래께서는 세간에 나타나시어 일승(一乘)의 참된 법을 말씀하시려 하나, 중생들은 부처님을 믿지 않고 비방하여 고통의 바다에 빠지게 될 것이며,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전혀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설법에 인색한 간탐(慳貪)에 떨어져 중생을 위하는 것이 못된다고 하시사, 현묘한 도를 널리 베푸시고 방편을 세워 삼승(三乘)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대승과 소승의 방편이 생겼고, 깨달음에도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게 되었으나, 이것은 모두 근본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오직 일승의 도가 있을 뿐, 나머지 둘은 참된 것이 아니다'고 하셨다. 그러나 마침내는 한 마음의 법[一心法]을 나타내시지 못했기 때문에 가섭을 불러 법좌를 함께 하시사, 따로이 그 '한 마음'을 부촉하셨으니, 이는 언설을 떠난 법이다. 이 한 가닥의 법령은 따로이 행해지는데, 만약 계합하여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즉시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
十月八日에 師謂休曰 言化城者는 二乘及十地等覺妙覺이니 皆是權立接引之敎라 並爲化城이요 言寶所者는 及眞心本佛이며 自性之寶라 此寶는 不屬情量이니 不可建立이니라 無佛無衆生하며 無能無所하니 何處有城이리오 若問此旣是化城인댄 何處가 爲寶所오하면 寶所는 不可指나 指卽有方所라 非眞寶所也니라 故로 云하되 <在近而已>요 不可定量言之니 但當體를 會契之하면 卽是니라 言闡提者는 信不具也니 一切六道衆生과 乃至二乘은 不信有佛果하니 皆謂之斷善根闡提요 菩薩者는 深信有佛法하고 不見有大乘小乘하며 佛與衆生이 同一法性이니 乃謂之善根闡提니라 大抵因聲敎而悟者를 謂之聲聞이요 觀因緣而悟者를 謂之緣覺이니 若不向自心中悟하면 雖至成佛이라도 亦謂之聲聞佛이니라 學道人이 多於敎法上에 悟하고 不於心法上에 悟하나니 雖歷劫修行이라도 終不是本佛이니라 若不於心에 悟하고 乃至於敎法上에 悟하면 卽輕心重敎하야 遂成逐塊하고 忘於本心故로 但契本心이요 不用求法이니 心卽法也니라 凡人이 多爲境礙心事礙理하야 常欲逃境以安心하며 屛事以存理하고
不知乃是心礙境理礙事로다 但令心空하면 境自空이요 但令理寂하면 事自寂이니 勿到用心也니라 凡人의 多不肯空心은 恐落於空이요 不知自心本空이니라 愚人은 除事不除心하고 智者는 除心不除事하며 菩薩은 心如虛空하야 一切俱捨하며 所作福德을 皆不貪着이니라 然이나 捨有三等하니 內外身心을 一切俱捨하야 猶如虛空하며 無所取着然後에 隨方應物하며 能所皆忘이 是爲大捨요 若一切行道布德하며 一邊旋捨하야 無希望心이 是爲中捨요 若廣修衆善하야 有所希望이라가 聞法知空하야 遂乃不着이 是爲小捨니 大捨는 如火燭在前하야 更無迷悟요 中捨는 如火燭在傍하야 或明或暗하며 小捨는 如火燭在後하야 不見坑穽하나니 故로 菩薩은 心如虛空하야 一切俱捨라 過去心不可得이 是過去捨요 現在心不可得이 是現在捨요 未來心不可得이 是未來捨니 所謂三世俱捨니라 自如來付法迦葉已來로 以心印心이니 心心不異라 印着空하면 卽印不成文이요 印着物하면 卽印不成法故로 以心印心이니 心心不異니라 能印所印을 俱難契會故로 得者少나 然이나 心卽無心이요 得卽無得이니라
佛有三身하니 法身은 說自性虛通法이요 報身은 說一切淸淨法이요 化身은 說六度萬行法이니 法身說法은 不可以言語音聲과 形相文字而求며 無所說無所證이요 自性虛通而已라 故로 曰 <無法可說이 是名說法라>하나니라 報身化身은 皆隨機感現하며 所說法도 亦隨事應根하야 以爲攝化하니 皆非眞法이라 故로 曰 <報化는 非眞佛이며 亦非說法者라>하나니라
所言同是一精明이 分爲六和合이니 一精明者는 一心也요 六和合者는 六根也라 此六根이 各與塵合이니 眼與色合하고 耳與聲合하며 鼻與香合하며 舌與味合하며 身與觸合하며 意與法合하야 中間에 生六識하야 爲十八界하나니 若了十八界無所有하면 束六和合하야 爲一精明이니라 一精明者는 卽心也니 學道人이 皆知此하되 但不能免作一精明六和合解하야 遂被法縛하야 不契本心이니라 如來現世하사 欲說一乘眞法則衆生이 不信興謗하야 沒於苦海요 若都不說則墮慳貪하야 不爲衆生이라하사 溥捨妙道하시고 遂說方便하사 說有三乘하며 乘有大小하며 得有淺深이 皆非本法이라 故로 云하사되 <唯有一乘道요 餘二則非眞이라>하시니라 然이나 終未能顯一心法故로 召迦葉同法座하사 別付一心하시니 離言說法이라 此一枝法이 別行하니 若能契悟者는 更至佛地矣니라
-------------------------------------------
* 흙덩이나 쫓는 개 : 사람이 흙을 던지면 영리한 사자는 사람을 물고, 미련한 개는 흙덩이만 쫓아간다는 말임.
'선림고경총서 > 선림보전禪林寶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편 전심법요(傳心法要) 9. 말에 떨어지다 (0) | 2016.07.01 |
---|---|
제1편 전심법요(傳心法要) 8. 도(道)를 닦는 다는 것 (0) | 2016.07.01 |
제1편 전심법요(傳心法要) 6. 마음을 잊어버림 (0) | 2016.07.01 |
제1편 전심법요(傳心法要) 5. 허공이 곧 법신 (0) | 2016.06.30 |
제1편 전심법요(傳心法要) 4. 일체를 여윌 줄 아는 사람이 곧 부처 (0) | 2016.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