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안록
2. 상 당
1.
개당하고 대낮이 되도록 차 마시는 자리에서 일어나질 않자 그때 승정(僧正)이 아뢰었다.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벌써 스님이 설법할 자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대중들이 벌써 진짜 선지식을 참례했구나" 하고는 잠깐 있다가 승당하였다.
한 스님이 물었다.
"대중이 구름같이 모였으니 스님께서는 법을 베풀어 주십시오."
스님은 "대중이 오랫동안 서 있었구나" 하고는 말씀하셨다.
"대중들이 이렇게 여기 다 모였으니, 내 아무말 안할 수가 없구나. 대중들에게 옛사람의 방편 하나를 들어주겠다. 몸 조심하라."
그리고는 문득 법좌에서 내려와 버렸다.
2.
자방상좌(子方上座)가 장경 혜릉(長慶慧稜 : 854~932)스님으로부터 찾아왔는데 스님은 장경스님의 게송을 들어 질문하였다.
"무엇이 만상 가운데 우뚝하게 드러난 몸이더냐?"
상좌가 불자(拂子)를 들자, 스님은 말씀하셨다.
"그렇게 이해해 가지고서야 어떻게 깨치겠느냐?"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만상이라 하느냐?"
"옛사람은 만상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만상 가운데 우뚝 드러난 몸, 무슨 부정을 하고 말고가 있겠느냐?"
자방상좌는 여기서 활연히 깨닫고 게송을 지어 바치며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이로부터 제방의 회상에서 알음알이를 떨어버리지 못한 자들[知解者]이 쏠리듯 찾아왔다. 처음에는 떠날듯이 하다가도 스님이 가만히 일깨워주니 모두들 점점 속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법회에 참례하는 대중들이 항상 천명을 밑돌지 않았다.
3.
대중들이 오래 서 있자 이윽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있다가 그냥 흩어진다 해도 불법 도리가 있겠느냐? 한번 말해 보아라. 없다면 여기에 와서 무엇을 할 것이며, 있다면 사람이 바글대는 큰 시장 속에도 있을텐데, 무엇 때문에 기어코 여기까지 찾아왔느냐?"
여러분은 각자 「환원관(還源觀)」「백문의해(百門義海)」「화엄론(華嚴論)」「열반경(涅槃經)」등 많은 책자를 보았을 것이다. 그 중 어느 교(敎)에 이런 경계가 있더냐? 있었다면 한번 꺼내 보아라. 이런 경 속에 이런 말씀이 있는데 바로 그런 경계가 아닐는지요라고. 그렇다 한들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심오한 말씀이 마음에 막히면 항상 알음알이의 바탕이 되고, 실다운 이치가 눈앞에 버티고 있으면 도리어 명상(名相)의 경계로 뒤바뀐다고 하였다.
자, 어떻게 해서 뒤바뀔 수 있겠느냐. 뒤바뀔 수 있다면 다시 어떻게 해야 바로 될 수 있겠느냐. 알겠느냐? 그런 식으로 책만 외우고 있지 말아라.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러자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떻게 드러내면 도에 부합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라도 설명해 낸다면 도에 부합하지 못할 것이다."
"여섯 감관[六處]에서 소리를 알아듣지 못할 때는 어떻습니까?"
"너의 집 권속은 한 떼나 되는구나."
스님은 다시 말하였다.
"어떻게 해야 알겠느냐. 이렇게 질문하는 바로 이것이 그대가 말한 '여섯 감관이 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지 말라. 눈[眼處]으로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귀[耳處]로도 소리를 듣지 못한다. 만일 근본이 있다면 알아들을 수 없음을 어떻게 이해하겠느냐. 옛사람은 빛과 소리를 떠나는 그것이 빛과 소리에 집착하는 것이며, 이름을 떠나는 그것이 바로 이름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상천(無想天)을 닦아 얻고 팔만대겁(八萬大劫)을 지나도 하루 아침에 퇴보하여 떨어지는 등의 엄연한 사실은 근본되는 진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3생 60겁(三生六十劫)과 4생 1백겁(四生一百劫)을 차례로 닦아 올라가서 3아승지겁(三阿僧祇劫)이 완성된 지위에 도달했다 치자. 그렇다 해도 옛사람은 그것을 연기무생(緣起無生)의 도리를 한 생각에 알아서 방편으로 세운 저 3승(三乘) 등의 견해를 초월하느니만은 못하다고 하였다. 또 손가락 튕기는 사이에 팔만 가지 방편을 완성하고, 찰나에 3아승지겁을 없앤다고도 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온몸으로 참구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힘을 좀 들여야 할 것이다."
4.
한 스님이 물었다.
"손가락은 묻지 않겠습니다만 무엇이 달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이 그대가 묻지 않겠다는 손가락이냐?"
"달은 묻지 않겠습니다만, 무엇이 손가락입니까?"
"달이지."
"저는 손가락을 물었사온데 스님께서는 어째서 달이라고 대꾸하십니까?"
"그대가 손가락을 물었기 때문이다."
5.
강남국주(江南國主)가 스님의 도를 높이 평가하고 보은선원(報恩禪院)에 맞이하여 머물게 하고 정혜선사(淨慧禪師)로 임명하였다.
한 스님이 물었다.*
"큰 종을 치자마자 대중들이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이렇게 스님께서 설법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대중들이 아는 것이 어찌 그대가 아는 것과 같으랴."
"무엇이 옛 부처의 가풍입니까?"
"어느 곳을 살핀들 부족하랴."
"하루종일 어떻게 처신해야 도에 계합할 수 있겠습니까?"
"택하고 버리는 마음이 교묘함과 거짓을 이룬다."
"옛사람이 전해주신 가사와 발우[衣鉢 : 法]를 어떤 사람에게 수기(受記)하시렵니까?"
"그대는 어디서 옛사람이 전해주신 의발을 보았느냐?"
"시방의 성현들이 모두가 이 가르침으로 들어온다 하니 무엇이 이 가르침입니까?"
"시방의 성현들이 모두 들어오는구나."
"무엇이 향상인(向上人)인 부처입니까?"
"방편으로 부처라고 부를 뿐이다."
"무엇이 배우는 이[學人]의 한 권 경전입니까?"
"제목이 매우 분명하다."
"성(聲) · 색(色)이란 두 글자를 누가 뚫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스님네들이여, 말해보라. 이 스님이 성 · 색을 뚫었느냐? 이 스님의 물음을 알아낸다면 성 · 색을 뚫기 어렵지 않으리라."
"부처님의 지혜[知見]를 구하는 데는 어느 길이 가장 첩경입니까?"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
"상서로운 풀이 시들지 않을 땐 어떻습니까?"
"말이 많구나."
"대중들이 구름같이 모였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물같이 얽힌 의심을 단숨에 풀어 주십시오."
"요사채에서도 헤아려 보고, 찻방에서도 헤아려 보게."
"구름장이 열리고 해가 보일 때는 어떻습니까?"
"진짜 너절한 말을 하는구나."
"무엇이 사문(沙門)이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접입니까?"
"털끝만큼이라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사문이라 할수 없다."
"천백억 화신(化身) 가운데 어떤 것이 청정법신(淸淨法身)입니까?"
"모두 다이다."
"떼지어 올라온다면 스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눈이 있느냐, 없느냐?"
"온통 알음알이뿐입니다. 스님께서 한번에 해결해 주십시오."
"그대의 알음알이는 저절로 깨져 버렸다."
"무엇이 옛 부처의 마음입니까?"
"사무량심[慈悲喜捨]을 흘려내는 것이다."
"백년 동안 어두웠던 방을 등불 하나로 밝힐 수 있습니다. 무엇이 등불 하나입니까?"
"무슨 백년을 말하느냐?"
"무엇이 진정한 도입니까?"
"첫번째 소원도 그대가 실행하게 하는 것이며, 두번째 소원도 그대가 실행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 한결같이 진실한 경지입니까?"
"경지에는 한결같은 진실이란 없다."
"무엇이 우뚝한 것입니까?"
"점점 더 빗나가는구나."
"무엇이 옛 부처입니까?"
"바로 지금이라 해도 꺼릴 것 없지."
"하루종일 어떻게 밟아가야 합니까?"
"걸음걸음 밟아 가야지."
"마음 거울[古鏡]이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환하게 비출 수 있습니까?"
"기어코 두번 세번 해야겠는가."
"무엇이 부처의 묘한 종지입니까?"
"이것은 그대에게도 있다."
"경전에서는 머뭄없는 근본에 입각해서 일체법이 성립한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이 머뭄없는 근본입니까?"
"모습은 형체가 없는 데서 일어나고, 이름은 이름붙기 전에서 나왔다."
"죽은 스님의 의발은 여러 사람이 창의(唱衣)합니다만* 조사의 의발은 누가 창의 합니까?"
"그대는 죽은 스님의 어떤 의발을 창의했느냐?"
"고향을 떠난 자식이 고향에 되돌아왔을 땐 어찌합니까."
"무엇을 정성껏 바치려느냐?"
"아무것도 없습니다."
"매일같이 쓰는 물건은 어떻게 하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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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한 스님이 물었다'에 해당되는 '문(問)'은 편집상 생략한다.
* 창의(唱衣) : 창(唱)은 물건을 팔 때 물품의 수량이나 품목, 가격 등을 부르는 것을 말하고, 의(衣)는 승려가 소유하고 있는 중요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창의는 죽은 승려의 간호비 · 약품비 · 장례비 등에 충당하기 위해 그가 지니고 있던 의발 등을 대중에게 경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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