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산암잡록山菴雜錄

산암잡록 上 44~50.

쪽빛마루 2016. 2. 22. 20:31

44. 인과 변화의 이치, 수행과 기도의 영험/ 고정(古鼎)

 

 경산사 고정(古鼎)스님은 태어날 때부터 난장이인데다가 입술은 위로 뒤집혀 있어 이와 잇몸이 드러나 보이고 목소리는 맑지 못하며 피부는 거치르고 메말랐었다. 어느 관상가가 그의 얼굴을 보고 점치기를,

 "네 가지 천한 모습이 난장이의 몸에 모여 있으니 이 사람 일생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고 하였다. 스님은 이 말을 계기로 마음에 맹세한 후 관음대사(觀音大士)에게 기도를 드렸는데 낮에는 관음보살의 이름을 헤아릴 수 없이 외우고 밤에는 보살 앞에 몇천 배를 올리면서 20년 동안을 이렇게 수행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천한 모습이 복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어, 입술은 펴지고 이는 보이지 않았으며 목소리는 부드럽고 피부는 윤택하게 되었다. 그후 지난 날의 관상가를 또다시 만났더니 축하하였다.

 "스님의 이제 모습은 옛 모습이 아닙니다. 더구나 벼슬할 수 있는 주름살이 생겨났으니, 머지않아 높은 자리에 올라 선풍을 크게 떨칠 것입니다.”

 그 해에 융교사(隆敎寺)의 주지가 되어 세상에 나갔으며 다시 융교사에서 보타사(寶陀寺)로 옮겨갔고 보타사에서 또다시 중축(中竺) 경산사의 주지로 승진되어 5년이 채 안되는 사이에 세 차례나 자리를 옮겼고, 경산사에서 12년간 주석하다가 79세에 입적하였다. 스님의 수행과 기도의 효험은 복과 수명을 더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습마저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마치 남의 집 창고에 물건을 맡겨 두었다가 찾아오듯 쉽사리 이러한 일을 해내 우리처럼 게으른 자를 격려했다고 할 만하다.

 

 

45. 자택사(紫籜寺) 창고지기 방 벽에 써 붙인 글

 

 혼원(混源)스님이 자택사(紫籜寺)에 주지할 때였다. 고사(庫司 : 창고 관리업무)가 거처하는 방의 벽 위에 벽기(璧記)를 쓰고 다시 그 끝에 덧붙였다.

 

물 한 방울 쌀 한 톨도

대중에게 속하는 물건이니

사람마음 즐겁게 하도록 힘쓰라

없는 살림 지탱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털 쓰고 뿔 돋힌 짐승의 업보를 생각해 보라

오랜 세월이 흐르다보면

인과에 밝은 사람이 나와

다행히 이 이치를 알게 될 것이다.

滴水粒米  盡屬衆僧

務悅人情  理難支破

當思披毛戴角  歲月久長

明因果人  幸宜知悉

 

 스님의 글씨는 오랜 세월에 퇴색되어 거의 마멸되었는데 뒤에 일산(一山)스님이 그 자리를 이어 벽을 다시 단장하고 직접 이 글을 써서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오로지 잇끝만을 도모하는 자는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다.

 

 

46. 문 닫고 사는 설법 / 노소(老素)수좌

 

 노소(老素)수좌는 일생동안 문을 닫고 은거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원 천력(元 天曆 : 1329~1330) 연간에 어느 한 선객이 노소수좌가 친필로 산에 은거하면서 나오는대로 회포를 적은 게송 세 수를 얻어 스승 귀원(歸源)스님에게 착어(着語)를 부탁하자 귀원스님이 말하였다.

 "총림에서는 그가 세상에 나와 설법하지 않았던 점을 유감으로 여기지만 이제 이 세 수의 게송을 읽어보니 마치 큰 범종을 한번 치면 모든 소리들이 사라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어찌 그가 설법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게송이 오랜 세월이 지나다보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때문에 눈에 보이는대로 몇 수를 기록해 본다.

 

전등록 읽다 보니 구렛나루 먼저 희고

애써 공부 다퉈온 지 몇 낙차(洛叉 : 십만 년)인고

낮잠 자다 깨어보니 책상 위엔 먼지만이 가득한데

처마 끝에 반쯤 드는 한가한 햇살 아래 뜨락의 꽃이 지네.

傳燈讀罷鬂先華  功業猶爭幾洛叉

午睡起來塵滿案  半檐閑日落庭華

 

뾰족한 지붕 낮게 고치지도 않고

위에는 긴 숲이 있고 아래엔 연못 있으니

깊은 밤 놀란 바람 노란 잎새 휘날려

오히려 쑥대밭에 내리는 비소리 같아라.

尖頭屋子不敎底  上有長林下有池

夜久驚猋掠黃葉  却如蓬底雨來時

 

덧없는 세상, 세월 얼마 남지 않아

애오라지 시를 쓰며 또 세월을 달래본다

오늘 아침 솔나무 아래에서

서풍을 등에 맞고 가마귀 수를 헤아려 본다.

浮世光陰自不多  題詩聊復答年華

今朝我在長松下  背立西風數亂鴉

 

 

47. 청소하는 눈 먼 수좌 / 나한사(羅漢寺) 증(證)수좌

 

 안산(雁山) 나한사(羅漢寺)의 증(證)수좌는 눈은 멀었지만 도안(道眼)은 명백하였다. 그는 아침마다 마당 쓰는 것으로 불사를 삼았는데 한 스님이 물었다.

 "이 한 조각 땅뙈기를 말끔히 쓸었는가?”

 증수좌가 빗자루를 세워 보였다. 또 다른 스님이 물었다.

 "진짜 깨끗한 곳은 본디 한 점 티끌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청소를 하는가?”

 또다시 증수좌는 빗자루를 세워 보였다.

 요청(樂淸) 지방에 구우산(九牛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증수좌는 이 산에 대하여 게송을 읊었다.

 

너덧 봉우리 무리를 이룬 지 몇 해던고

봄 가을 겪어오며 바람과 아지랑이로 배불렸네

맑은 연못 물을 언제 한 번 마셔볼까

푸른 들판 갈지 않은 채 긴 잠에 취해 있네

 

낱낱의 발꿈치를 모두 땅에 붙이고서

하나하나 콧구멍은 먼 하늘에 솟아있네

보통 천봉의 정상에 서 있으니

온누리 사람 온다한들 어떻게 끌고갈까.

 

四五成群知幾年  春來秋去飽風煙

淸池有水何曾飮  綠埜不耕長自眠

 

個個脚跟皆點地  頭頭鼻孔盡撩天

尋常只在千峰頂  大地人來作麽牽

 

 

48. 귀원(歸源)스님의 문하

 

 귀원(歸源)스님이 천복사(薦福寺)의 주지로 있을 때, 어느 날 저녁 문하의 스님들과 차를 마시면서 소동파(蘇東坡)가 장산사(蔣山寺)의 불혜 천(佛惠泉)스님을 방문하였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천스님이 소동파에게 물었다.

"선비는 성씨가 무엇이요?”

"저울(秤)이요.”

"무슨 저울?”

"천하 노스님의 혓바닥을 재는 저울이요.”

이에 천스님께서 악!하고 할을 한 뒤,

"이 할은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말해보라”고 하니 동파가 말이 없었다.

 

 귀원스님은 스님들에게 각기 소동파를 대신하여 한마디 해보라고 하였다. 당시엔 대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오로지 원(源)장주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촛불을 껐고 일(一)시자가 한 차례 기침소리를 내니 스님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였다.

 "원장주는 촛불을 끄고 일시자는 한 차례 기침소리를 냈겠다!”

 이 말에 뒤이어 정(定)장주는 스님께서 한마디 해달라고 청하니 스님이 말하였다.

 "아마 네가 한다해도 이 범주를 넘지 못할 것이다.”

 원장주는 뒷날 온주(溫州) 수창사(壽昌寺)의 별원(別源)스님이었으며 일시자는 명주(明州) 천동사(天童寺)의 요당(了堂)스님으로서 두 사람 모두가 귀원스님의 법통을 이었으며 정장주는 바로 대자사(大慈寺)의 천우(天宇)스님으로 축서(竺西)스님의 문하에 있었다.

 원 지정(元 至正 : 1341~1367) 연간에 강제(江淛 : 浙江省) 행성(行省)의 승상 달세철목이공(達世鐵穆爾公)이 선정원(宣政院)일을 겸직하였는데 행성(行省)의 일을 발표하면서 스님에게 두번이나 격문을 보내 천동사와 경산사의 주지로 삼으려 하였지만 스님은 모두 늙고 병들었다는 핑계로 사양하였다.

 

 

49. 수창사(壽昌寺) 별원 법원(別源法源)스님의 인품

 

 온주(溫州) 수창사(壽昌寺)의 별원(別源法源)스님은 봉화 사람이다. 오랫동안 귀원(歸源)스님에게 귀의하여 불법을 이으려는 일념으로 다른 길을 걷지 않았다. 무제 본(無際本)스님이 강심사(江心寺) 주지로 있을 무렵 노년에 그에게 주지 일을 분담하여 납자 지도하는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가 백학사(白鶴寺) 주지가 되어 세상에 나가게 되자 무제스님은 후한 예우로 법제자가 되어주기를 바랐지만 별원스님은 웃기만 할 뿐, 은혜에 보답하는 첫 향불을 귀원스님에게 올리니 총림에서는 그의 인품에 감복하였다. 스님은 주지 자리를 세 차례나 옮겼는데 사찰에 들어가면 먼저 객승채를 수선하고 필요한 모든 물건을 갖추어 놓아 그곳을 찾는 운수납자들은 마치 자기 방에 들어간 듯하였다. 67세에 가벼운 병환이 있었는데 제자인 선암사(仙岩寺)의 호(晧)장로와 몇 마디 말을 나누다가 문득 돌아가셨다.

 

 

50. 선종사찰을 교종사찰로 바꾸려는 계획을 막다 / 각암 몽진(覺菴夢眞)스님

 

 고소산(姑蘇山) 승천사(承天寺)의 각암(覺菴夢眞)스님은 종지와 설법에 모두 통달하여 사람들은 그를 '작은 대혜선사'라고 일컬었다.

 원 지원(元 至元 : 1335~1340) 연간에 화엄종의 강주(講主) 모씨가 조정에 아뢰어 강남지방의 양절(兩浙)에 있는 유명한 사찰을 화엄종 사찰로 바꾸고 교종사찰의 서열을 선원보다 높은 위치에 올려 놓고자 조정의 윤허를 받들고 남방으로 내려오는 길에 승천사를 찾았다. 그 이튿날 각암(覺菴)스님이 법당에 올라 그를 위하여 법문을 하였는데, 화엄경의 전체 종지를 광범하게 인용하여 종횡무진으로 설법하면서 여러 스님들의 논의나 해석의 잘잘못을 마치 손바닥보듯 명확하게 분석해내니 그 당시 화엄종의 강주는 여태껏 듣지 못했던 바를 듣고 큰 법익을 얻었다. 그리하여 '승천사처럼 작은 사찰의 장로마저도 이런데 더구나 항주 큰 사찰의 종사(宗師)는 어떻겠나'하고는 되돌아갔다. 다시 상소를 올려 앞서 내린 어명을 중지케 하였는데 실로 각암스님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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