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전쟁 때 잃은 어머니를 찾아 / 승도(僧導)스님
승도(僧導)스님은 오흥(吳興) 사람이다. 원나라가 강남을 공격했을 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은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가자 도스님은 고아가 되어 백부가 길렀다. 그의 나이 14세가 되자 백부에게 '사람마다 부모가 있는데 나는 어찌하여 부모가 없느냐'고 묻자 백부가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는 어머니를 찾기로 결심하고 다시 물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너와 닮은 얼굴이다.”
그는 마침내 거울 하나를 지니고 이발기술을 익혀 먹고 살 밑천을 삼으면서 10년 동안 찾아 헤매었지만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생각지 않게 하간부(河間府) 장원현(狀元縣)에 이르러 말 키우는 늙은 군인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의 어머니를 사로잡아간 자였다. 그를 따라 그의 집에 돌아가서 미처 앉기도 전에 밖에서 들어오는 한 노파가 있었는데 남부지방의 말씨가 섞여 있었다. 도스님은 거울을 꺼내 자기 얼굴을 비춰보니 그 노파와 비슷하였다. 얼른 큰 절을 올리면서, 어머니 하고 부르자 노파는 고향과 성명과 생년월일 등을 물어 보았는데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이에 모자는 서로 부둥켜 안고 크게 울었으며 마을사람들이 모여 지켜보았다.
열흘쯤 머문 후 도스님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그 집안의 늙고 어린 가족들이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몰래 도망하여, 양주(楊州)에 이르러서 작은 가마를 구하여 그 속에 어머니를 앉히고 가마를 메고 갔는데, 열 걸음 걸을 적마다 한 번씩 쉬면서 사방에 큰 절을 올리고 그 다음엔 어머니께 절하였다. 곧장 사명(四明)의 보타산(寶陀山)에 이르러 관음대사현상(觀音大士現相)에 기도드린 다음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도스님이 출가하려 하자 모친은 그를 허락하였는데 얼마 후 모친이 죽어 화장하자 잿속에서 작은 옥으로 만든 관음상 일구(一軀)가 나왔으며, 지금까지도 이를 의흥(宜興) 남문 밖 정사(精舍)에 봉안하여 공양을 올리고 있다. 그 정사는 도스님이 지은 절이다.
52. 두 스승에게 천태와 선의 종지를 공부하다 / 아암 무(我菴無)법사 상천축사(上天竺寺)의 아암 무(我菴無)법사는 황암(黃岩) 사람이다. 방산(方山)스님에게 귀의하여 삭발하고 중축사(中竺寺) 적조(寂照)스님을 찾아뵙고 문서에 관한 일을 보면서 시봉하였다. 그의 외숙은 태학(太學)의 원로 선비였는데 그를 잡아당겨 개종하도록 하니, 그는 연복사(演福寺)의 담당(湛堂)스님을 찾아뵙고 열심히 교학을 연구하였다. 적조스님은 그가 떠난 것을 애석히 여겨 게송을 보냈다. 교에서 선으로 들어오는 것은 예나제나 있는 일이지만 선에서 교로 들어가는 것은 고금에 없던 일 일심삼관(一心三觀)이 문이 다르다 하지만 천강에 물은 가득한데 달만이 외롭구나. 從敎入禪今古有 從禪入敎古今無 一心三觀門雖別 水滿千江月自孤 뒷날 세상에 나와 담당(湛堂)스님의 법제자가 되었으며 뒤이어 한묶음의 향을 올려 적조스님에게 보답하였으니 발자취가 다르다 하여 두 마음을 가지지 않았음을 보여준 셈이다. 적조스님이 입적할 무렵 스님은 사명 땅 연경사(延慶寺)의 주지로 있었는데, 적조스님은 그에게 대소(大蘇 : 天台)와 소림(少林 : 선종) 이가(二家)의 종지를 넓히는 데 힘써 줄 것을 유서로 부탁했을 뿐 다른 말은 없었다. 스님은 또한 적조스님의 영전에 향을 사르며 말하였다. 묘희의 오대 후손 중 가장 빛나는 불꽃 적조스님은 이 시대 감로*문일세 슬쩍 부딪치기만 해도 간뇌(肝腦)가 터지고 차가운 얼음 위에 갑자기 따뜻한 봄볕 내 생각하니 콧구멍을 잃어버린 날에 무슨 숨이 지금껏 남아 있겠소 북풍이 불어 오는 날 이 해도 저무는데 번갯불이 친다한들 공중에 무슨 흔적을 찾아볼까. 妙喜五傳最光燄 寂照一代甘露門 等閑觸著肝腦裂 氷雪忽作陽春溫 我思打失鼻軫日 是何氣息今猶存 天風北來歲云暮 掣電討甚空中痕 그는 얼마 못살고 아무런 병 없이 백운당(白雲堂)에서 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 * 원문의 '雲'은 '露'의 오기인 듯하다. 53. 능력과 상황에 맞게 소임을 안배하다 / 천동사(天童寺) 동암(東岩)스님 동암(東岩)스님은 강서(江西) 사람으로 81세에 사부대중의 추천으로 천동사(天童寺)의 주지가 되었다. 그 당시 천동사는 몹시 퇴락해 있었는데 스님은 노년에 중임을 맡아 편안히 기거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그의 문도 동(東) · 원(圓) · 경(慶) 세 사람을 불러 각자에게 일을 분담시켰다. "동아! 나는 강서 사람들과 인연이 있으니 네가 그곳을 찾아가 나의 뜻을 대신 전하여 재화(財貨)를 얻어 만수건원보각(萬壽乾元寶閣)을 세우고 구리로 여래불상 천 구와 아울러 공양구를 주조토록 하라. 이 일은 네가 맡아 할 일이다. 원아! 너는 관리들의 일을 잘 알고 있으니 관청 일을 네가 맡도록 하라. 경아! 너는 조심스러워서 위아래로 화목하니 병들고 수척한 이를 살피는 일은 너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의각(衣閣 : 조사의 의발을 보관하는 곳)을 지키도록 하라.” 그 후 5년이 채 안되어 건물이 준공되고 불상이 조성되었으며 나머지 재산을 가지고 상산(象山) 지방의 바닷가에 뚝을 막아서 사찰의 식량으로 쓰게 하니, 관청도 무사하고 상하 간이 화목하고 엄숙하였다. 비록 동 · 원 · 경 세 사람의 힘이라 하지만 스님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쉽사리 이뤄질 수 있었겠는가? 요즈음 스승들을 살펴보면 그의 무리를 살찌우는 데만 힘쓸 뿐, 절이 퇴락해도 마치 길손이 길가의 버려진 헌집을 바라보듯 조금도 개의치 않으니 괴이한 일이라 하겠다. 54. 하안거 결제법문에서 소임맡은 제자들에게 / 단교(斷橋)스님 단교(斷橋)스님은 성격이 꼬장꼬장해서 납자들을 인정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가 국청사(國淸寺)의 주지가 되던 날 영상담(泳象潭)을 수좌로, 구고전(垢古田)을 서기로 삼았다. 당시 장주의 성명은 전해오지 않는다. 여름 결제 때 불자를 들고 법당에 올라 인사말을 한 다음 법문을 하였다. "수좌는 선배 스님들에 비해 칭찬할 만하지 못하고 서기가 하는 법문은 마치 인물을 그릴 때 모든 것을 다 그려놓고 눈동자를 찍지 않은 격이며 장주가 하는 법문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이러고서도 뒷날 나는 노승의 법회에서 소임을 보다가 왔노라 하겠지!” 그는 불법 주관하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불법을 손상한다거나 후학을 오도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았는데, 비록 말로는 그들을 눌렀으나 실제로는 그들을 일으켜주었다. 오늘날 불법을 주관하는 자들은 자신의 안목은 밝지 못하면서 사탕발림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사는 데 힘쓰고 그들이 감동하여 법제자가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아! 만일 단교스님이 이런 속된 짓을 보았더라면 어찌 침을 뱉고 욕을 하는 데 그쳤겠는가. 55. 아들 둘 낳고 출가하여 도를 이루다 / 희길상(喜吉祥) 진강(鎭江) 보조사(普照寺)의 희길상(喜吉祥)은 산동 사람으로 피부가 새까맣고 깡말라 인도 승려와 비슷하였다. 젊은 나이에 부모에게 출가하겠다고 말씀드리자 부모는 후손을 잇지 못하는 죄 크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부인을 맞이하여 두 아들을 낳은 뒤에야 승려가 되어 유식업(唯識業)을 주로 익혔다. 지원(至元) 25년(1294)에 설선황제(薛禪皇帝 : 元 世祖)는 강회(江淮) 지방에 36군데에 어강소(榮講所)를 창건하였는데 보조사(普照寺)도 그 중의 하나였으며 그곳 주지로 스님을 명하였다. 스님은 강설하는 일 말고는 「화엄경」 10권씩 읽는 일로 일과를 삼았다. 운남사(雲南寺)의 단 무념(端無念)스님과 교류하였는데 무념스님은 유식종의 종장이었다. 두 사람이 불법을 자세히 논하다가 무념스님이 조금치라도 오류를 범하면 법사는 바른 말로 고쳐주었으며 무념법사는 진심으로 굴복하였다. 열반 후 다비를 하니 많은 사리가 나왔는데 그의 문도가 유골과 사리를 거두어 검은 옷칠을 먹인 함 속에 20년 간 모셔오다가 비로소 단도(丹徒) 땅 우산사(雩山寺)에 부도탑을 세웠다. 그런데 부도탑에 사리를 넣으려던 날, 함을 열어보니 사리는 함 속의 보자기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마치 벌이 모여 있는 듯, 개미가 모여 있는 듯하였으며 만져보니 빛이 찬란하였다. 진강(鎭江)지방 사람들은 그의 초상화를 그려 사당에 모신 사람이 많았으며 그를 '길상 부처님'이라고 하였다. ----------------------------------------- * 원사 석로전(元史 釋老傳)에는 엄길상(嚴吉祥)으로 되어있다. 56. 생전에 불법을 닦으면 / 자안(子安)스님 명주(明州) 해회사(海會寺)의 승려 자안(子安)스님은 원 지정(元 至正) 계묘년(1363) 가을, 보당(寶幢) 저자 위의 산을 사들여 암자를 지으려고 터를 닦다가 세 개의 옛 무덤 구덩이[竁]를 발견하고서도 흙으로 메운 후 암자를 지었는데 그 뒤에 병을 앓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풍도(酆都)에 들어가니 옛 의관을 갖춘 세 사람이 염라대왕 앞에 무릎을 꿇고 자안의 죄를 참소하였다. "자안(子安)은 전생의 성이 조(趙)씨며 이름은 사굉(仕宏)인데 지난날 관리로 있으면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누명을 씌워 우리를 먼 곳으로 유배 보냈습니다. 그 당시 함께 굴욕을 당한 사람이 네 명이었으나 이미 사면을 받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생전에 불법을 닦은 인연으로 죽자마자 제도되었으나 우리 세 사람은 죽은 후 모두 이곳에 안장되었는데 이제와서 또다시 우리들의 무덤까지 파헤치니 원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원래 우리는 힘을 합해 그를 죽이려고도 하였지만 그가 관리로 있을 때 80명의 승려에게 공양을 올렸기에 이 생에 그는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감히 그를 죽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염라대왕이 자안을 불러 앞으로 오도록 한 후 그들의 땅을 되돌려 주라는 꾸지람을 듣다가 꿈속에서 깨어나니, 어디선지 "진실한 말을 어기지 말라!”하는 소리가 세 차례나 들려왔다. 이튿날 깨끗한 자리를 마련하고 영고목(榮枯木)스님을 명하여 계법(戒法)을 설하였는데 그 뒤로 자안은 쾌유되었다. 자안은 마침내 암자를 헐고 다시 옛 무덤을 만들어 준 후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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