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종용록從容錄

종용록 上 제15칙 앙산이 가래를 꽂다[仰山揷鍬]

쪽빛마루 2016. 4. 2. 03:45

제15칙

앙산이 가래를 꽂다[仰山揷鍬]

 

 

시중

 대중에게 보이시다.

 말하기 전에 아는 것을 묵론(默論)이라 하고, 밝히지 않아도 스스로 드러나는 것을 암기(暗機)라 한다. 산문[三門] 앞에서 합장하면 양쪽 복도[兩廓] 밑에서 경행[行道]하는 것은 그런 대로 의미가 있거니와 안마당[中庭]에서 춤을 추는데 뒷문 밖에서 곤대짓을 하는 것이야 또 어찌하리오?

 

본칙

 드노라.

 위산(潙山)이 앙산(仰山)에게 묻되 "어디서 오는가?" 하니,

 -온 곳을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앙산이 대답하되 "밭에서 옵니다" 하였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풀숲에 빠졌었느냐[落草]?

 

 위산이 다시 묻되 "밭에는 몇 사람이나 있던가?" 하니,

 -다만 애비와 아들 둘뿐입니다.

 

 앙산이 가래를 땅에 꽂고 합장하고 섰다.

 -놓아버림이 너무 위태롭군!

 

 위산이 이르되 "남산에는 많은 사람들이 새[茆]를 깎더라" 하니,

 -풀숲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할 뿐이겠지.

 

 앙산이 가래를 뽑아 들고 떠나버렸다.

 -거두어들임이 너무 빨랐군!

 

평창

 스승께서 이르시다.

 스승과 제자가 도에 부합했고, 애비와 아들이 기개가 맞았다. 위산과 앙산의 가풍은 천고의 귀감일런가?

 위산이 앙산에게 "어디서 오는가?" 했으니, 위산이 어찌 앙산이 밭에서 오는 줄 몰랐으리요마는 이 질문 하나를 던져서 앙산과 만나려 했던 것이다. 앙산 또한 윗분의 물음을 저버리지 않고, 그저 "밭에서 옵니다" 했으니 일러보라. 불법의 도리가 있는가?

 위산이 범의 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다시 묻되 "밭에는 몇 사람이나 되던가?" 하매 앙산이 가래를 땅에 꽂고 합장하고 섰으니 납승들의 만나는 격식이 갖추어졌거늘 현사(玄士)는 말하되 "내가 그때 보았더라면 가래를 걷어차서 쓰러뜨렸을 것이로다" 하였으나, 만송은 이르노니 "더 이상 쓴웃음을 참을 수가 없구나!" 하노라.

 투자 청(投子靑)이 송하되 "위산이 온 곳을 물었는데 아는 이가 없어서 / 땅에다 삽을 꽂아 답했으나 불조(佛祖)가 땅에 묻혔다 / 걷어차서 쓰러뜨림을 현사는 곁에서 긍정치 않아 / 먼 산 봉우리에 봄빛 시들어짐을 면하게 했다" 하였는데 만송은 이르노니 "풀이 마르니 새매의 눈치가 빨라졌다" 하노라. 남악(南岳) 법륜사(法輪寺)의 평(平)선사가 송하되 "좁은 길에서 만났으니 피할 길 없어 / 가래를 내려 꽂고 합장하고 섰더라 / 다리[橋]를 지나서 언덕 위로 걸어갈 제 / 비로소 온몸이 진흙 물투성이임을 깨달았네" 하였는데 만송은 이르노니 "차마 달 밝은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도다" 하노라.

 두 노숙(老宿)의 송에는 다만 천 자[尺] 되는 쓸쓸한 솔만 있구나. 다시 죽죽 가지를 뻗은 돌 죽순[石笋] 같은 천동의 송을 보라.

 

송고

 늙은 스승이 자손 걱정이 지나쳐서

 -노파심이 지나치게 간절하군!

 

 지금껏 가문만 일으킨 일을 부끄러워하노라.

 -30년 동안 염장[鹽醋]은 끊이지 않았었다.*

 

 남산에서 새[茆] 벤단 말, 꼭 기억할지니

 -귀한 사람은 잊음이 많은데

 

 뼈에 새기고 살에 새겨, 은혜에 보답하소서.

 -원한의 마음은 버리지 못하리.

 

평창

 스승께서 이르시다.

 이 한 게송은 마치 한문(韓文)의 「모영전(毛潁傳)」과 같아서 이와 사[理事]가 쌍으로 드러났고, 진과 속[眞俗]이 겸하여 들추어내 졌다.

 얼핏 보기에 위산은 늘그막에 이르른 이 같고, 앙산은 아랫사람이라 자손인 듯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어떤 승이 장사잠대충(長沙岑大蟲)에게 묻되 "본래의 사람[本來人]도 부처를 이룹니까?" 하니, 장사(長沙)가 대답하되 "그대는 대당(大唐)의 천자가 띠나 풀을 깎으리라 하느냐?"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건대 띠를 깎는 것은 신하와 아들 쪽의 일임을 알겠다.

 "지금껏 가문만 일으킨 것을 부끄러이 여긴다"니 천 년의 그림자 없는 나무가 지금의 밑바닥 없는 신발이요, 주지(住持)의 살림은 천 봉우리의 달이요, 의발(衣鉢)은 한 개울의 구름이라. 이는 모두가 힘을 얻은 자손들이 가업(家業)을 이어나가는 모습이다. 이로써 알라. 군 · 신과 부 · 자는 조동종(曹洞宗)에서 처음 세운 것이 아니라 위산과 앙산 부자가 이미 이 정령을 시행했었다.

 만일 위산이 점검해서 간파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그림자의 문턱에서 죽이나 밥의 냄새를 희롱하면서 말구 중의 행세[驢前馬後]로 평생사업이라 여겼을 것이니 심히 애석한 일이로다. 그러기에 천동이 "남산의 띠 베는 사람"이라는 한 토막의 이야기를 기억해서 뼈와 살에 새겨두고 은혜 갚기를 다함이 없게 한 것이다. 법등(法燈)이 이르되 "농부가 땔나무를 짊어지고 돌아와서 / 지어미를 재촉하여 밤을 새워 길쌈을 짜도다 / 그 집안 살림 바쁜 것을 보건대 / 일러보라. 누구의 힘을 이어받았겠는가? / 그에게 물어도 그가 알지 못하여 / 공연히 의혹을 내도다 / 애달프구나! 고금의 사람들이 몇이나 은덕을 알런가? / 안 뒤에는 어찌했던고? / 팔을 끊어도 아픈 줄 모르고 / 눈 위에 섰으되 피로한 줄 모르도다" 하였다. 그러기에 만송도 노년에는 보은원(報恩院)에 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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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악 회양선사가 말하기를 "마조 도일이 강서지방에서 설법을 하면서도 소식 한번 전하지 않는구나" 하고는 중 하나를 마조에게 보내면서 "그가 상당하기를 기다렸다가 나서서 '어떻습니까?'라고만 묻고 그가 무슨 말을 하거든 기억해가지고 오라"고 당부하였다. 그 중이 분부대로 다서 물으니 마조가 대답하기를 "아무렇게나 살아온 지 30년 동안 한번도 염장이 끊긴 적은 없었노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