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칙
엄양의 한 물건[嚴陽一物]
시중 |
대중에게 보이시다.
그림자를 희롱하기 위해 몸뚱이를 수고롭게 하는 것은 몸뚱이가 그림자의 근본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소리를 지르면서 메아리를 멈추게 하려는 것은 소리가 메아리의 뿌리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소를 타고 소를 찾는 바보짓이 아니라면 말뚝으로 말뚝을 뽑으려는 짓임이 분명하다. 어찌해야 이런 허물을 면할 수 있을까?
본칙 |
드노라.
엄양존자(嚴陽尊者)가 조주(趙州)에게 묻되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가 어떠합니까?" 하니,
-역시 분수 밖의 일이구나!
조주가 이르되 "놓아버리라[放下着]" 하였다.
-살에 붙은 속옷까지도 벗어버려야 된다.
엄양이 다시 묻되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놓아버릴 것이 무엇입니까?" 하니,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모르고 소는 자기의 힘을 모른다.
조주가 이르되 "그렇다면 짊어지고 가라" 하였다.
-불러도 돌아보지 않으니 어찌하리요?
평창 |
스승께서 이르시다.
홍주(洪州) 무녕현(武寧縣) 신흥사(新興寺)의 엄양존자(嚴陽尊者)가 처음으로 조주에게 가서 묻되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을 때가 어떠합니까?" 하였는데, 이는 어떤 승이 보자(報慈)에게 묻되 "망정이 생기면 지혜가 막히고 모습이 변하면 본체가 달라지거니와 망정이 생기기 전에는 어떠합니까?" 하니, 보자가 이르되 "막혔느니라" 한 것과 같다. 바보스러운 무리[暮故底]들은 이르되 "망정도 생기지 않았는데 막힐 것이 무엇인가?" 하는데, 이는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버릴 것이 무엇입니까?" 한 것과 똑같은 맹팔랑(孟八郞)이다.
조주가 이르되 "놓아버릴 수 없다면 짊어지고 가라" 한 것은 말 끝에 크게 깨닫게 한 것이다. 불과(佛果)는 법어(法語)에서 이 부분에 대한 황룡(黃龍)의 송을 들어 착어를 내렸다.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두 어깨에 짊어지고 일어날 수가 없도다.
-불과는 착어하되 "눈 밝은 사람은 속이기 어렵다" 했다.
말끝에 홀연히 잘못을 아니,
-불과는 착어하되 "뒷걸음질 치다가는 구덩이에 빠진다" 하였다.
마음속의 끝없는 기쁨이로다.
-불과는 착어하되 "가난한 이가 보배를 얻은 것과 같다" 하였다.
독과 악이 마음에서 없어지니
-불과는 착어하되 "끝없는 묵은 업이 다할 때 청정해진다" 하였다.
뱀과 범이 동무가 되도다.
-불과는 착어하되 "짐승들이 골고루 알아듣느니라" 하였다.
적요(寂寥)한 천백 년이여! 맑은 가풍이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하였다.
-불과는 착어하되 "뉘라서 우러르지 않으리요?" 하였다.
선사(엄양)는 가는 곳마다 항상 뱀 한 마리와 범 한 마리에게 손바닥에다 먹이를 주는 것이 과위를 얻은 사람 같았으므로 존자라 불리웠다. 옛 부처로 불리우는 조주와 존자는 범부인지 성인인지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이니, 한 말씀을 토하거나 한 가지를 물으면 천추를 두고 만인의 귀감이 되었다. 천동은 근일의 종장[師僧]들이 거친 마음이 더욱 성해지는 것을 보고 풀을 쳐서 뱀을 놀라게 하는 송을 지었다.
송고 |
섬세한 행마를 막지 못해 선수(先手)에 졌으니
-흑백이 나뉘기 전에도 바른 가운데 치우침[正中偏]이 있다.
마음 거칠었음을 스스로 깨닫고는 쑥스러이 고개를 숙였네.
-호구(虎口)에다 바둑알을 놓았다.
판이 끝나자 허리에 찼던 도끼자루 썩으니,
-일러보라, 지금은 어느 시점인가?
범인의 뼈를 깨끗이 씻고 신선과 함께 거닐도다.
-머리가 가볍고 눈이 밝았다.
평창 |
스승께서 이르시다.
왕개보(王介甫)노인이 바둑 둘 때의 은어(隱語)가 있었으니 이르되 "저쪽도 감히 먼저 하지 못하고, 이쪽도 감히 먼저 하지 못한다. 감히 먼저할 수 없는 바로 그것 때문에 다툼이 없고 다툼이 없는 바로 그것 때문에 죽지도 살지도 않는 데로 들어간다" 하였는데, 바둑이란 앞서기를 다투는 법이다. 약하면 선수(先手)부터 약하고 지면 머리가 숙여진다. 조주는 상대가 손을 쓰기 전에 벌써 몇 수를 내다보는데 엄양은 그저 옆으로 달리고 곧게 들여치노라 군 점이 몇 갈래나 되었던가? 그래서 도끼자루가 이미 썩은 줄도 몰랐다.
「왕씨신선전(王氏神仙傳)」에 전하는 말이 있다. 진(晋) 융안(隆安) 때에 신안현(信安縣)에 사는 왕질(王質)이라는 사람이 나무를 하러 갔다가 현실판(眩室坂)에 이르니, 석실(石室)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 네 동자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왕질에게 무엇인가를 주는데 크기가 대추씨 만한 것이 머금고 있으니 시장하지 않았다. 바둑이 끝나자 허리에 찼던 도끼 자루가 썩어내렸고 옷이 바람결에 다 날아가버렸다. 저물녘에 집에 돌아오니 이미 수십 년이 지났다고 하였다.
'놓아버리라, 짊어지고 가라' 한 조주의 두 마디의 말씀이 힘줄을 뽑아내고 골수를 바꿔 주어, 단번에 조주와 더불어 손을 잡고 함께 걸으면서 허공을 딛고 거뜬거뜬 움직이게 한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맑고 한가로우면 참 도의 근본이요, 일이 없으면 작은 신선이라" 하였거니와, 일 없음으로써 일이 없다고 여기지 말아야 하나니 간혹 일은 일 없는 데서 나오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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