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설봉록雪峰錄

8. '24경시'의 운을 따름 9~17.

쪽빛마루 2016. 7. 22. 11:41

9. 무자비(無字碑)

 

한 조각 이름난 비 길가에 누웠는데

용 무늬 새 무늬 옛부터 새겨 있었네

비끼는 달빛에 매화나무 그림자 옅은 먹같이 담박하고

비에 씻긴 이끼 자국은 침같이 매끄럽구나

 

하늘이 잘된 문장을 사랑해서 천둥 번개로 빼앗아가고

땅은 괴석에 자갈물려 눈서리에 굳어지게 하는데

밤마다 별들이 비추어 주려 해도

오랜 세월 아무도 서까래 하나 세워 준 사람없네.

一片名碑偃徑邊  龍章鳥篆古曾鐫

月斜梅影淡如墨  雨洗苔痕滑似涎

天愛奇文雷電取  地箝怪石雪霜堅

要令夜夜星辰照  歲久無人構一椽

 

10.만송관(萬松關)

 

만그루 높고 높은 솔 하늘에 가지런히 꽂혔는데

홀로 우뚝이 뛰어난 모습 보리의 대열에 서있네

달빛 속 엷은 그림자 서리 덮인 뿌리 차갑고

비온 뒤 짙은 그늘에 풀밭길 분간키 어렵구나

 

송화가루 나부낄 때 그 향기 골짜기를 메우고

흰 복령 나는 곳은 그 기운에 땅이 익어지는데

관문 앞에 사이사이 아름다운 대나무 심어놓아

푸른 난새 붉은 봉새 와서 깃들게 하였네.

萬樹喬松揷漢齊  孤標挻秀列菩提

月中影淡霜根冷  雨後陰濃草徑迷

黃粉飄時香逗谷  白苓生處氣蒸泥

關前間植琅玕竹  引得靑鸞紫鳳栖

 

11. 설교로(雪嶠路)

 

은산철벽 속에서 오래 살자니

높고 높은 한가닥 길 오가는 사람 없는데

천신이 옥씨 뿌려 섬돌에 옥돌을 깔고

날개달린 신선은 구름을 타고서 범천궁을 산보하네

 

꿈속에서 구천에 들어가니 내 혼은 아득해지고

깨어보니 삼천세계는 달빛이 희미하구나

봉우리를 돌고 묏부리를 돌아서 구름 깊은 곳에는

멀리 티끌세상과는 그 길이 같지 않다네.

久住銀山鐵壁中  岧嶤一徑少人通

天神種玉鋪瑤砌  羽客乘雲步梵宮

夢入九霄魂杳渺  覺來千界月朦朧

峰廻岫轉雲深處  迥與紅塵路不同

 

12. 용면방(龍眠方)

 

산세는 구불구불 반 경사져서

잠든 용과 흡사한데 안개가 길을 막았네

솔 밑에 마른 뿌리는 늙은 뼈에 서린 듯하고

대밭가의 새 죽순은 신령한 이빨 튀어나온 듯하네

 

해 저물면 옛절에 돌아와 참된 법문을 듣고

새벽엔 동쪽 숲에서 붉은 노을 마시는데

창해에 밤 깊어 밝은 달 뜰 때면

턱의 여의주 한 알은 찬란한 빛을 뿌리네.

蜿蜓山勢半欹斜  髣髴龍眠霧氣遮

松底枯根蟠老骨  竹邊新笋逬靈牙

暮歸古寺聞眞法  晨向東林咀絳霞

滄海夜深明月上  頷珠一顆散光華

 

13. 문수대(文殊臺)

 

육출봉(六出峰) 마루턱에 쌓인 푸르름

황홀한 문수대는 꽃으로 된 누각 같구나

유마거사는 병든 몸을 보이며 침상에 누워있고

용녀는 여의주 바치려 바다 위로 나왔네

 

사자좌에는 따뜻한 향기서린 안개 감돌고

하얀 상골봉에는 상서로운 별이 맴도니

세상사람들 맑고 시원한 이 뜻을 알 수 있다면

대지에 봄이 돌아와 저절로 꽃이 피리라.

六出峰頭翠作堆  文殊臺恍近華臺

維摩示疾牀中臥  龍女呈珠海上來

獅座氤氲香霧繞  象峰皎潔景星回

時人會得淸凉意  大地春歸花自開

 

14. 고경대(古鏡臺)

 

본래 밝은 거울이라 해도 그것은 대가 아니니

거울이 만약 밝으면 마음은 저절로 열리는 것

아리따운 파란 난새는 둥근 그림자 지으며 춤추고

곱고 고운 옥토끼는 빛을 보내오는구나

 

거울 속에 일렁이는 햇빛은 활활 불타오르고

벗겨진 등의 푸른 구리에는 묵묵히 이끼 돋았네

바다끝 하늘가에 구름 다 흩어지면

선심(禪心)은 교교하게 밝아서 온 세상을 비추네.

本來明鏡亦非臺  鏡若明兮心自開

窈窕靑鸞團影舞  嬋娟玉兎送光來

中涵日色星星火  背剝銅靑點點苔

海角天涯雲散盡  禪心皎皎照京垓

 

15. 금오교(金鼇橋)

 

멀리 파란 하늘에 솟아오른 오산이 보이고

금오교는 또 은하수 나루터를 걸터타고 있구나

서울로 가는 길은 천가닥으로 갈라져도

원천에서 나오는 물, 만갈래가 같은 줄기라

 

한낮에 자취없이 교화의 죽장을 하늘로 치켜들고

푸른 하늘에 그림자 드리워 날아가는 무지개에 이어지네

서쪽으로 가신 고승은 언제 돌아오시나

다릿가의 소나무 가지도 동쪽으로 향하려 하는구나.

遠見鼇山聳碧空  鼇橋又跨漢津中

衢通京國千岐路  水出源頭萬派同

白晝無蹤騰化杖  靑霄有影接飛虹

高僧西去何時返  橋畔松枝欲向東

 

16. 나한애(羅漢崖)

 

석장 하나 날아와서 높은 대에 머무시니

깎아지른 높은 절벽 사람왕래 끊어졌네

개울가에 내리는 비는 용이 내려주는 발우를 씻어주고

바위가에 바람 일면 호랑이 엎드린 언덕

 

새끼 안은 검은 원숭이는 푸른 나무 엿보고

새끼 끌고가는 흰 사슴은 파란 이끼 핥아보네

모든 번뇌 다 잊어버릴 줄 미리 알았기에

쇠지팡이로 두드려도 도대체 문 열어주지 않는구나.

一錫飛來駐上台  巉崖高處絶人來

澗邊雨洗降龍鉢  岩畔風生伏虎臺

抱子玄猿窺綠樹  引麑白鹿舐蒼苔

懸知諸漏都忘盡  鐵杖敲門總不開

 

17. 제운령(梯雲嶺)

 

멀리멀리 돌계단이 개인 하늘에 걸려있고

산은 길게 구비돌아 개울물을 마시는 무지개 같네

소리 끊긴 기러기는 아련히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듯하고

돌아가는 까마귀는 떨어지는 햇빛 옆을 지나네

 

가물거리는 저 끝에 멀리 사람 그림자 보이고

아득한 노을 속에 소나무가 타내는 거문고소리 가깝게 들리는구나

고요한 밤 밝은 달 뜨는 줄도 몰랐는데

선녀의 영롱한 노리개가 향기짙은 바람을 흔드는구나.

迢迢石磴掛晴空  山轉橫垂飮澗虹

斷雁恍疑天上落  歸鴉閃與日邊通

遠看人影依微際  近聽松琴杳靄中

靜夜不知明月上  玲瓏仙佩振香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