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설봉록雪峰錄

서문

쪽빛마루 2016. 7. 28. 03:59

서문

 

 아! 말법시대를 만나 정법이 시드니, 성인, 진인과는 더욱더 멀어지고 마구니와 외도 등 사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내가 왜 늦게야 세상에 태어나서 부처님 계신 세상을 만나지 못하는가, 슬프기만 하다. 그런 까닭에 지극히 맑은 소리는 듣지 못하였고 현묘한 이해는 통달하기 어려우니 어찌 내 생활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그러나 다행히 숙세의 인연을 몸에 차고 있어서 분에 넘치게도 스님네의 무리에 몸담게 되었다. 그리하여 범서(梵書)를 펼쳐 연구하고 대장경을 섭렵해 보았으나 우러러볼수록 그 진리의 바다는 깊고 깊었다. 너무 기뻐서 몇 해를 그 속에 푹 젖어 지낸 끝에 나의 어둠이 점차 열리게 되었으니 참으로 하루 공부하면 하루만큼 늘어나고 하루 게으르면 하루만큼 없어짐을 알겠다.

 내 비록 그 깊숙한 아랫목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담장이나 대문은 넘어섰다. 이 빛나는 집안의 갖가지 아름다움은 분명 내가 오를 수 있는 모습이니 누가 헛되게 세월만 보내며 미혹을 달갑게 여겨 배우기를 버리려 하겠는가. 이른바 한 축의 두루마리 책 속에 성품의 하늘이 환히 빛난다는 말이 진정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 진각대사는 선심(禪心)이 철저하기 전에는 구름따라 물따라 행각하는 고달픔을 꺼리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일찍이 투자산에 세 번 오르고 아홉 번이나 동산에 오르는 고생을 맛보셨다. 그 뒤 오산진에서 종지를 깨쳐 마음의 눈이 탁 트이고 의심없는 경지를 그대로 얻어 비로소 평생의 뜻을 풀게 되었다. 그 후 웅장한 설봉산에 걸터앉아 우뢰같은 법음을 진동하게 되어서는 완전한 사자의 위용을 나타내시고 제호맛 같은 법유(法乳)를 흘려 주셨다. 최상근기를 맞아 많은 방편으로 이끌어주심을 보이시고 후학을 빨아들여 뒷사람에게까지 도움을 주셨다. 말이 없는 경지에서 말씀을 내놓았고 들음 없는 경지에서 뚜렷이 듣게 하셨으니 그 노파심은 간절한 것이었다. 이야말로 이른바 "방랑하는 자식 생각에 몹시도 나그네를 가여워하고 빈 술잔 채우는 일이 버릇이 되었건만,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 안타깝구나[曾爲浪子偏憐客 慣愛添盃惜醉人]!" 하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마다 모두가 번뇌를 녹여 깨달음이 청정케하고, 그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근본에 통달하고 망정을 잊게 하였다. 그리하여 신비한 구슬이 손 안에 있는 것이므로 딴 곳에서 찾을 것 없음을 홀연히 깨닫도록 하였다. 지극한 보물이 품안에 있으면 응당 스스로 기뻐할 일이다. 그런 까닭에 문자를 통해 나타내지만 이치는 말 밖으로 벗어난 것이다.

 옛 말에 "말할 줄 아는 일은 혓바닥에 달린 것이 아니고 보는 능력은 눈동자를 빌리지 않는다"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런 까닭에 불법을 만나기란 마치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서 나무토막을 만나는 만큼이나, 또는 실오라기 같은 겨자씨에 바늘을 맞추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다. 석가부처님은 옛날 온몸을 내던져 게송 반마디에 보답하였고 상제(常啼)보살은 심장과 간을 팔아 반야를 구하였으니 어찌 성인의 말씀을 쉽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

 나는 지난날 조사[雪峰]의 어록을 읽고는 보배처럼 숭상해 왔다. 그런데 빌려다 본 사람이 욕심으로 돌려주지 않은데다 불이 나는 바람에 판각이 잿더미가 되었다. 나는 송구한 마음으로 탄식하고 안타까워하였다. 그 좋은 말씀이 막혀서 전해지지 않아 후학들이 거울삼을 곳이 없게 될까 염려가 되었다. 그리하여 빌려준 책을 도로 찾아 드디어 완본을 간행하였으니 천년 뒤까지도 조사의 마음이 환하게 빛나게 하고자 하는 바이다.

 

황명(皇明) 만력(萬曆) 병술년(1586) 9월 1일, 설봉사 만학비구 정명(定明)이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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