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화엄경 강사를 조복시킴/ 영명 연수(永明延壽)스님
영명 연수(永明延壽)스님이 말하였다.
“겹겹이 묘한 이 법문이란 이름과 말의 길이 끊기었고, 지혜로 설한다 해도 견문만 넓혀질 뿐이니 반드시 깨달아야만 알 수 있고 알음알이[情識]로 이해될 것은 아니다. 만일 몸소 깨달음을 얻으면 모두 현량(現量)의 경계로서 어디서나 법계로 들어가며 생각생각마다 비로자나불을 볼 수 있겠지만 단지 문자의 뜻만을 따라 이해한다면, 이는 5음 8식(五陰八識)에 의지해 안 것이기에 좋고 싫은 경계를 만나면 다시 막히게 되고 모두 의심으로 변한다.”
염관 제안(鹽官齊安 : ? ~842)스님은 「화엄경」을 강의하는 대강사에게 물었다.
“「화엄경」에는 몇 가지 법계가 있소?”
“간단히 말하면 열 가지 법계가 있고, 넓게 말하면 겹겹이 끝이 없습니다.”
이에 염관스님은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면서, “이것은 몇 번째 법계인가?”라고 묻자, 그 스님이 머리 숙여 생각하려는 찰나에, 염관스님은 큰 소리로 꾸짖었다. “사려를 통해 이해하려 한다면 귀신의 굴 속에서 살 꾀를 내는 격이며 햇빛 속에 깜박이는 등불이니, 빛을 잃고 말리라”하고 쫓아버렸다.
내가 「화엄경」을 살펴보니, 승열바라문(勝熱婆羅門)*의 불더미와 칼산은 분별없는 반야지혜라 한다. 그렇다면 「화엄경」에 주소(注疏)를 붙이는 사람이야말로, 용을 그리다가 용이 보이자 깜짝 놀라 붓을 내던지고 달아났던 섭자고(葉子高) 같은 부류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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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열바라문(勝熱婆羅門) :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방문한 열 번째 선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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