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께서 임금께 남긴 글[大師遺表]
엎드려 아뢰옵니다. 유한한 색신이 어떻게 흥망성쇠의 한탄을 면할 것이며, 모습없는 실상에 누가 흘러가는 세월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이미 바람 앞의 등불이요 타오르는 횃불이라 세상에 머물기는 어렵고, 물속에 비친 달 허공에 핀 꽃이라 어디로 갈 곳이 없습니다. 법도대로 살아감에 허물을 피할 길 없어 육신의 껍질을 벗어버리는 말을 드릴까 하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원래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거적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벌써 불교[空門]를 매우 흠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간절한 서원을 청정히 세워 다른 일을 다 그만두고 불교 경전을 탐구하는 데만 마음을 온통 기울였습니다. 어떤 때는 밥 먹는 것마저 잊은 채 마주하여 법을 물었고, 눈 속에 서서 알기를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17년 세월을 모진 풍상에 시달리며 수천리 넘는 길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서야 비로소 원숭이같이 날뛰던 마음이 쉬고 말같이 치달리던 생각이 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름 덮힌 소석산(韶石山)*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살면서 초산(楚山)의 신선들* 처럼 머리는 백발로 변해갔습니다. 그러다가 영광스럽게도 천자(天子)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파도에 몇 번이나 몸을 담그는 커다란 행운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도를 따져 묻고 공(空)을 논하면서 하늘같은 덕에 보답하리라 맹세했고, 어리석음을 열어주고 막힌 데를 터주면서 물따라 구름따라 다니는 납자들을 별똥 튀듯 탁 깨우쳐 주었습니다. 이렇게 중생을 이익케 하리라는 발심을 펼 수 있었던 것은 멀리까지 밝으신 천자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외람되게도 계속해서 천자의 부르심을 받고 대궐에서 여러 번 뵈어 널리 베풀고 기쁘게 내려주신 은혜가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그러나 몸을 어루만지며 슬퍼한들 운명을 하는데야 무엇으로 보답하리까. 저는 늙어빠진 말처럼 나이먹고 기운이 줄어 슬기로우신 은혜를 감당하지 못하고 갑자기 병에 걸려 아침저녁 목숨이 다하기만을 기다리리라 생각진 못했습니다.
아득한 은하수 길을 멀리 바라보나 겨우 북극성을 볼 뿐이며, 세차게 흐르는 물결에 눈동자를 돌리니 이미 동쪽 바다로 흘러들어갑니다.
저는 천자께서 긴긴 봄날처럼 장수를 누리시기를 진심으로 바라옵니다. 그리하여 바위 겁(劫)이 다하도록 교화를 펴시고, 도모하시는 계획은 겨자씨 겁이 끝날 때까지 길이 견고하소서.
보잘것없는 이 몸은 이제 남은 시간이 없습니다. 하직하는 마당에 대궐로 달려가 축수(祝壽)하고 이별하지 못함이 한스럽습니다. 하늘같은 천자의 덕을 우러러 그리워하며 어쩔 줄 모르는 심정만 가득한 채 삼가 글을 올려 아뢰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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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석(韶石) : 광동(廣東) 소관시(韶關市) 북쪽에 있는 돌산. 순임금이 남쪽지방을 돌 때, 이 돌산에서 소(韶)음악을 연주했다고 전해진다.
* 초산의 신선 : 한(漢) 고조(高祖) 때 초산에서 세간을 초월하여 살았다는 네 명의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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