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산광태선원광진대사행록
(雲門山光泰禪院匡眞大師 行錄)
스님의 휘(諱)는 문언(文偃), 성은 장씨(張氏)다. 대대로 소주 가흥(嘉興)에 살았으며, 바로 진왕경동조참군(晋王冏東曹參軍) 장한(張翰)의 13대 손이다.
스님은 숙세로부터 영특한 모습을 타고나 중생을 위해 세상에 나오셨다. 그러므로 겨우 일곱 여덟살 쯤 되어서부터 뜻이 곧고 욕심이 없으며 세속을 싫어하셨던 것이다. 드디어는 공왕사(空王寺)의 지징율사(志澄律師)에게 출가하여 제자기 되었다.
그 영민한 기질은 타고난 것이었고, 지혜로운 논변은 하늘이 주신 것 같아서 모든 경전을 외움에 번거롭게 다시 열어 보는 일이 없었으므로 지징율사는 대근기라고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자라서 머리를 깎고 비릉단(毘陵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 후 되돌아와 지징율사 곁에서 그를 모시면서 여러 해 동안 강의하고 사분율(四分律)의 내용을 깊이 공부하였다. 엄격하고 청정하게 계율을 닦아 깨달음의 바탕[悟器]이 깊숙이 틔워졌다.
이에 지징스님을 하직하고 황벽(黃檗)스님의 법을 이은 목주 도종(睦州道宗)스님을 찾아갔다.
도종스님은 도와 세속이 만날 수 없음을 알고 옛 절에 숨어 살면서 혼자서 도를 닦았다. 비록 세속 일을 버리고 고고하게 도를 닦았으나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져 존경을 받게 되었다. 납자들이 찾아오면 엄격하고도 재빠른 솜씨[機辯]로 지도하여 절대로 머뭇거리며 생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스님이 처음 뵈러 갔을 때, 세 번째 문을 두들기자 그제서야 빗장을 열어주었다. 스님이 들어가려는 순간 도종스님이 밀어내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같으니라구” 하시니 스님은 여기서 그만 밝게 깨달았다. 그리고 나서도 여러 해를 묻고 참례하여 그윽하고 묘한 데에 깊이 들어갔다. 도종스님은 스님의 마음이 빈틈없고도 확 트여 불법을 거뜬히 감당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대의 스승이 아니다. 이제 설봉 의존(雪峯義存)스님을 찾아가서 지도를 받고 더 이상 여기에 머물지 말라.”
스님은 그 말씀을 듣고 영중(嶺中)으로 들어가 설봉스님에게 갔다. 여러해 동안 열심히 정진한 끝에 의존스님과 계합하여 드디어는 비밀스럽게 인가받고 법을 부촉받았다. 이로부터 다시 의존스님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스님은 참례를 끝내고 영중을 나와 여러 총림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다른 방법들까지도 철저하게 공부하였는데 칼끝 같은 기봉과 논변은 깎아지를 듯이 뛰어나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영수원 지성(知聖)스님의 도량에 갔는데, 지성선사는 전부터 스님이 오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북을 울리고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수좌(首座)를 맞이해 오도록 하라” 하였는데 그때 과연 스님이 도착하였다. 그 전부터도 지성스님은 영수원에 수십년을 살면서 큰 방 맨 위자리를 비워 두었다. 대중들이 상좌를 임명해 달라고 여러 번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언젠가는 말하기를, “수좌될 사람은 이제서야 막 제방을 돌아다니고 있다” 하였는데 스님이 찾아오자 비로소 수좌로 임명하였다.
지성스님이 돌아가시면서 스님에게 법석을 잇게 하려고 은밀히 글을 써서 함 속에 넣어두고 문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은 뒤에 혹 임금이 여기에 행차하시거든 이 유서를 보여드리도록 하라” 하였는데 과연 임금이 때마침 어가(御駕)를 몰아 산으로 떠났다. 지성스님은 임금이 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큰방에 올라가 가부좌를 튼 채 임종하였다. 임금이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죽었으므로 임금은 대사의 마지막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으니, 문도가 함을 꺼내와 바쳤다. 열어보니 “인간 · 천상의 안목은 큰방수좌이다”라고 쓰인 글이 나왔다. 임금은 이에 자사(刺史) 하희범(何希範)에게 칙명을 내려 예의를 갖추고 스님을 청하여 법회를 잇게 하였다. 이 일로 임금은 훌륭하다고 여겨 흠모하였고 여러 번 대궐로 불러 법을 물었는데, 그때마다 메아리가 대답하듯 응수하였다. 임금은 마음속으로 더욱 감복하여 드디어는 붉은 가사와 법호를 내렸다.
그 뒤 운문산으로 옮겨가 폐허가 된 절터를 수리하고 집채를 크게 신축하였다. 조사의 자리에 앉아 계셨던 24년 반 동안 도풍이 사방에 퍼지고 교화가 크게 떨쳐져 참선하는 납자들이 모여들었다. 문에 올라 입실(入室)한 자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도 없을 정도였으며, 백운산(白雲山)의 실성대사(實性大師)도 바로 스님의 수제자이다.
스님은 건화(乾和) 7년 기유(己酉 : 949) 4월 10일에 돌아가셨다. 미리 글을 올려 임금과 하직하였으며, 아울러 유계를 쓰신 뒤에 가부좌를 맺고 돌아가셨다. 그리고는 곧 임금께서 내린 탑액(塔額)을 받았으나 “내 몸을 방장실에 두고 혹 임금이 탑액을 내리시거든 방장실에 걸어 둘 뿐 따로 탑을 세우지는 말라” 하신 유언을 받들어 문도들은 그 말씀대로 스님을 방장실에 모시고 이를 탑으로 삼았다.
스님은 이에 앞서 제자 실성(實性)스님에게 법을 부촉하여 도량을 잇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모두들 입을 모아 “실성스님은 이미 도를 펴며 제자를 기른다” 하므로 현재 법회에 있는 문인 법구(法球)스님으로 바꿔 임명하여 자리를 잇게 하였다.
아―아, 세상을 이끌어주실 스승이 가셨도다. 지팡이 짚고 어두운 길을 가는 눈먼 자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나 뇌악은 다행히도 스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스님께서 하셨던 일을 대강이나마 안다. 그러므로 감히 이렇게라도 써서 사방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남기지 않을 수 없다.
기유(己酉 : 947)년 4월 25일에 집현전의 뇌악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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