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운와기담雲臥紀談

운와기담 上 31~34.

쪽빛마루 2015. 10. 16. 08:22

31. 유방명(劉方明)과 돌 관음상

 

 조양(조양) 유방명(劉方明)이 소흥(紹興 : 1131~1162) 연간에 기부(夔府) 태수로 있을 때였다. 어느날 밤 고을의 누각에 올라갔다가 흰 광채가 땅에서 뻗어 나오는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그곳을 조사해 보도록 하였더니 군영의 훈련장이었다. 동이 트기를 기다려 몇 자를 파다가 그 속에서 한 말쯤 되는 바위를 발견했는데 그것을 절반으로 쪼개자 빛나는 하나의 원상(圓相)이 나왔다. 유씨가 기뻐한 나머지 「서석찬(瑞石讚)」을 지어 바위에 새기려고 하였는데 때마침 감선자(鑒禪者)라는 이가 그곳을 지나다가 일러주었다.

 "어찌하여 원상에다가 불상을 새겨 사람들이 신앙하는 터전으로 삼지 않는가? 그 광채는 불상이 아니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유씨는 그의 말을 수긍하여 이백시(李伯時)가 그린 관음상을 조각하였다. 당시 대혜 스님이 형양(衡陽)에 계셨는데 그에게 찬(讚)을 부탁하였다.

 

인(因)도 아니요 연(緣)도 아니요 자연(自然)도 아니라

이 바위 이 그림도 역시 그런 이치니

광채가 그림을 감싼 것도 아니요

그림이 광채 속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두 가지 모두 사량으로 분별하기 어려우니

관음보살께서 중생을 제도하심도 그러하도다

내 게를 지어 이 뜻을 밝히는 데 도움을 주려 하니

보는 자는 마땅히 몸과 입과 마음을 청정히 할지어다.

 

非因非緣非自然  此石此畫亦復爾

是光非攝此身相  是相非從是光裏

 

二俱難以意測量  大士度生亦如是

我作此偈助發揮  觀者當淨身口意

 

 이 찬은 「광록(廣錄)」에 수록되어 있지만 그 계기에 대한 사실이 누락되었으므로 찬의 대의를 볼 수 없다.

 

 

32. 이를 잡아 화로에 태우며 법문을 들려주다 / 정손(淨遜)감사

 

 풍성(豊城)의 정손감사(淨遜監寺 : 절 살림을 맡은 직책)는 여릉(廬陵)의 도일 유나(道一維那)와 함께 천남사(泉南寺) 교충 광(敎忠光)선사의 법석은 도와 강호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광선사는 바로 대혜스님께서 '선장원(禪狀元)이라는 별호를 지어준 자이며 손감사는 재주가 깊고 생각이 고상하며 재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날씨가 차가운 세모에 여러 벗들과 화로를 둘러싸고 앉았는데 때마침 손감사가 이 한마리를 잡아 화로 불 위에 태우며 장난을 하니, 이를 비웃는 사람이 있었다.

 "단사자(端獅子)스님은 새벽을 알리는 닭을 위해서도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는데, 사형은 이를 태워 죽여놓고 어찌 법문으로 제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손감사가 입을 벌리자 곧 송이 이뤄졌다.

 

이여! 나의 말을 귀담아 듣고

앞으로 잘 기억하기 바라노라

네가 이의 몸으로 떨어짐은

고기와 핏덩이를 탐했던 까닭이라

 

천당에 가서 태어나지 못하고

내 속옷에 와서 살면서

새끼를 기르니 그 이름은 '서캐'라

그 서캐 무수하구나

 

나으 몸 또한 견고하지 못하니

너 어찌 영원히 견고하랴

알지어다! 몽환같은 이내 몸은

번갯불 같고 아침 이슬 같음을

 

내 이제 방편을 열어

너에게 몸 바꿀 곳을 가르쳐 주노니

이 화로에서

결코 놀라거나 무서워 하지 말라

 

이번 업보신이 다하면

왔던 길을 다시는 걷지 말아라

결국 너를 어느 곳으로 가라할까

맹렬한 불더미 속에서 한 소리 퍽 튀기며

진진찰찰에 다시 돌아오지 말지어다!

 

蝨子聽我語  自今宜記取

汝墮於蝨中  爲貪血肉故

 

天堂不去生  來生我裩袴

養兒名作蟣  其蟣多無數

 

我身亦非堅  汝豈能長固

當知夢幻軀  如電亦如露

 

我今開方便  示汝轉身處

向此一爐中  切莫生驚怖

 

盡此一報身  莫復來時路

畢竟敎伊向甚麽處去

烈焰堆中爆一聲

塵塵刹刹無回玄

 

 이에 많은 벗들이 깜짝 놀라 단사자의 글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감탄하였다. 얼마 후 손선사는 고향으로 돌아가 역사안(力士岸)의 초과사(超果寺)에서 입적하였다.

 내가 일찍이 옛집을 지나면서 게를 지어 애도를 표한 바 있다.

 

총림에 드나든 지 어느덧 20년

부지런히 부지런히 불법과 이웃하였네

금우(金牛)가 도탄을 만난 지 그 몇번인가

콧구멍이 입술위에 걸려있음을 이제야 알았네

 

눈먼 당나귀만 가지고도 바른 눈이 열리는데

어찌 사자가 몸 뒤집을 때까지 기다리랴

생사를 해결했으니 무슨 미련 있겠는가

만고의 가을하늘 달빛이 새롭구나.

 

出處叢林二十春  孜孜矻矻道爲隣

金牛幾度遭塗炭  鼻孔方知搭上脣

 

纔藉瞎驢開正眼  豈期獅子遽飜身

死生旣了餘何憾  萬古秋空月色新

 

 또한 일찍이 매양(梅陽)에 가서 대혜(大慧)선사를 찾아뵙고 하직한 후 양서암(洋嶼菴)으로 가서 광(光)선사의 병환을 간호하자 대혜선사가 게를 지어 보냈다.

 

도의를 잊지않고 민땅을 떠나

양서암의 간호승이 되었구나

매양의 장독 연기 자욱한 동굴을 뛰쳐나가

천산만수에 노니는 등나무 지팡이 하나.

不忘道義閩中去  洋嶼菴中看病僧

趒出梅陽煙瘴窟  千山萬水一條藤

 

 당시 광선사는 복당(福唐) 귀산사(亀山寺)의 주지를 그만두고 해상사(海上寺)의 양서암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33. 아미타불 잘 그리던 유미타(喩彌陀)

 

 전당(錢塘)의 유미타(喩彌陀)는 젊었을 때부터 오로지 아미타불상을 그리는 것으로 업을 삼아 왔다. 양걸차공(楊傑次公)이 그의 정교한 솜씨에 탄복하여 그의 성(姓)을 붙여서 '유미타'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어느 부사(部使)가 그에게 아미타불을 그렇게 잘 그리면서 어찌하여 참선은 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게를 지어 그에게 답하였다.

 

일생동안 미타불을 그릴 줄만 알 뿐

참선을 모르니 어찌하면 좋을꼬

다행히 오호의 풍월이 있으니

태평성대에 병기를 쓸 게 있으랴.

平生只解畫彌陀  不解參禪可奈何

幸有五湖風月在  太平何用動干戈

 

 얼마 후 서호 칠보산(七寶山)의 암벽에 불상을 조각하여 강이나 뭍으로 왕래하는 자들이 모두 우러러보도록 하였는데 그 높이가 백여척이나 되었다. 문하시랑(門下侍郞) 설공(薛公)이 그에게 물었다.

 "저 미륵불은 천궁에 계시면서 제천의 보살에게 설법하는데 여기에 바위를 뚫어 새겨서 무얼하려는가?"

 이에 대해서도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쯧쯧! 바위덩이여

모두 석공의 손에서 다듬어져

이제는 엄연한 미륵불이니

하생하여 구해주기 기다리지 마오.

咄哉頑石頭  全憑巧匠修

只今彌勒佛  莫待下生求

 

 그는 35세에 승적을 얻고 법명을 사정(思淨)이라 하였다. 그리고는 성문 북쪽에 거처를 마련하고, 발우를 들고 걸식을 하면서 백만승려에게 밥보시를 하기로 기약하였는데 20년이 채 못되어 팔백만에 이르렀다. 이에 고을에서 묘행원(妙行院)의 사액(寺額)을 그곳으로 옮겨 그의 노력을 표창해 주었다. 그 후 방납(方臘)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도적들이 전당(錢塘)을 침범하자 정선사는 그들 앞에 나가서, '내 한몸으로 한 고을의 생명을 가름하겠다'고 하니 그의 성심에 감동되어 적의 횡포는 조금이나마 식어졌다.

 

 

34. 불 타 없어진 능인사(能仁寺)를 중건하다 / 온(溫)선사

 

 소주(蘇州) 풍교사(楓橋寺)의 온(溫)선사가 처음 고산(鼓山)노선사를 찾아뵙고 시봉하면서 그를 따라 안탕(雁蕩) 능인사(能仁寺)에 머물러 가는데 미처 그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온 절이 불길에 싸여 하루저녁에 한 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이에 온선사가 사찰중수를 주관하게 되자 고산노선사는 세 수의 게를 지어 그를 고무하였다.

 

늙은 나는 고선사의 북을 두들기지 않고

안탕산으로 돌아와 늙은 몸 쉬려하는데

높은 불전 큰 누각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개울가에 두 서너 채 초가집만 남았구나.

老禪不打鼓山鼓  投老來歸鴈蕩山

傑閣隆樓渾不見  谿邊茅屋兩三間

 

온선사는 적삼 한벌로 지내지만

무쇠같이 딱딱한 입으로 제방을 설득했네

기꺼이 나를 위해 발우들고 떠나가니

진실로 사향노루 있는 곳에는 향기나도다.

溫禪單打布衫過  口硬如鐵說諸方

肯爲老禪持鉢去  信之有麝自然香

 

칠백칸 집들을 언제나 다 지으며

십만관의 금전을 어느제 모아올까

허리띠 매고 학을 타 사람

도인이라야 바야흐로 눈앞의 기연을 깨달으리.

七百間屋幾時了  十萬貫錢何日歸

除是腰纏更騎鶴  道人方了目前機

 

 온선사가 호구사에 도착하니 승당 앞에 백금 수백덩이가 버려져 있었다. 그래서 승복으로 머리를 덮어쓰고 앉아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는가를 엿보고 있으려니, 과연 허둥지둥 찾아 오는 이가 있었다. 까닭을 물으니, 그는 대답은 하지 않고 오로지 슬픈 얼굴만을 지을 뿐이었다. 이에 온선사가 그에게 서서히 말하였다.

 "이 못난 놈아! 만일 잃어버린 물건이 있다면 절에 가서 성명과 물건을 기록하고 찾아 가도록 해야지."

 "스님의 말씀대로만 된다면 그 돈의 삼분의 일을 모연에 돕겠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걸식은 나의 오만한 마음을 꺾고 다른 이에게 불법 인연을 맺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는데 내가 어떻게 그 돈을 쓸 수 있겠나."

 온선사는 원래 곤궁하여 적삼 한 벌로 지내는 터였지만 구차스럽게 시주를 받지 않았고 나아가 옛 가르침을 인용하여 거절하였으니 근본을 아는 스님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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