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전차도학사(錢次道學士)에게 드리는 글
사람마다 서 있는 자리에 이 하나의 큰 일을 갖추고 있어서, 부처와 중생이 아무 다름이 없습니다. 다만 부처는 깨달아 원융하고 뭇 중생들은 물들고 미혹하여, 이윽고 서로가 현격하게 멀어졌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인이 나와서 유독 큰 법을 창도하시니, 이를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 합니다. 특별히 상근기만을 제접(提接)하여, 요컨대 날카로운 근기를 가진 종성(種性)에게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서로 드러내어 다시는 머뭇거리지 않고 우뚝히 행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때문에 영산회상에서 본보기를 세워 꽃을 들자마자 가섭이 미소하였던 것이니, 만약 그가 이랬느니 저랬느니 한다면 즉시 빗나가버립니다.
그릇과 도량이 이미 같으면 헛되게 전수함이 없습니다. 이로부터 근원과 근원이 이어져 지금에 이르기까지 깨달음을 얻은 자가 항하수 모래알 만큼이나 많습니다.
구지(俱胝)스님의 경우 천룡(天龍)스님을 뵙고 한 손가락을 얻었으며, 조과(鳥窠)스님이 실오라기 하나를 입으로 불자 시자가 크게 깨달았습니다. 어찌 많은 주장과 설명으로 도리어 그들의 참된 성품을 어지럽혔겠습니까.
요점을 들어 지적한다면 영리하고 지혜로운 상근기만이 육근 · 육진을 투철히 벗어나 생사를 끊으려고 마음 먹습니다. 일상 가운데서 눈을 높이 두어 만 가지 인연과 높고 낮은 모든 경계가 전혀 실재하지 않음을 간파해냅니다. 오직 본래 신령하고 밝은 큰 해탈만이 고금에 훤히 뻗쳐 영원토록 살아 움직입니다. 일념에 계합하여 걸림 없음을 얻으면 나다 남이다 하는 지견과 세간의 지혜와 변재와 총명, 기쁨과 성냄, 잘잘못과 갖가지 집착을 문득 놓아버립니다. 모든 것을 마음에 평온하게 지녀 나날이 작용하면서도 애초에 걸림이 없으니, 부딪치는 대로 척척 들어맞아 모두가 본지풍광이 됩니다. 사물을 따라 형체를 나타내되 갖지도 맞이하지도 않으면서 담담하고 진실하고 고요합니다. 죽는 날에 가서는 확실하게 얻었으니, 이른바 "꽉 붙들어 주인이 된다"한 것입니다.
듣지도 못하였습니까. 방거사가 성태(聖胎)를 길러나가다가 떠날 때 우적상공(于頔相公)에게 말하기를 "있는 것을 비우려 할지언정 없는 것을 채우려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을. 그리고는 상공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가 떠났습니다.
양시랑(楊侍郞)은 투철하게 깨달아 절개를 세우고 벼슬길에 선 분인데 마지막 죽음에 임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물거품이 일었다 꺼지되 그 두 가지 법은 본래 같다. 진정 돌아갈 곳을 알고자 하느냐? 조주(趙州) 동원(東院)의 서쪽이로다."
이는 맺힌 곳에서 힘을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정성을 간직하고 흠모하는 것은 본시 보고 듣는 것으로 말 밑천 삼기를 바래서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확실하게 청정히 하여 안으로는 텅 비어 한가함을 지키고 밖으로는 견문을 툭 트이게 하여 가만히 지혜의 칼날을 움직여 정욕을 끊고 회광반조하기를 요한 것입니다. 마치 영운(靈雲)스님이 복사꽃을 보고 깨닫듯, 향엄(香嚴)스님이 대나무에 기왓조각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닫듯이 말입니다. 나아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그대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한 것이나, 바람이 방울소리를 울린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울릴 뿐이다"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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